<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 SBS


<보보경심>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있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무렵 도서관에서 원작 소설을 발견하고 읽어보았다. 가벼운 로맨스 소설일 거라는 지레짐작과 달리, 작가는 청나라 역사를 꽤 연구해 소설을 썼고, 주인공은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중국 고전에 대해 그 정도 소양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고전에 대한 지식이 있어 과거의 사람들과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리메이크 드라마는 고려 태조 시대를 배경으로 했고, 원작의 꽃황자들은 태조의 수많은 태자(太子)들로 설정했다는 소식에 시대 선택은 꽤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라마의 설정과 이야기 전개 방향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원작의 황자 vs. 고려의 태자

주요 등장인물인 황자들을 중국 원작과 동일하게 황자(皇子)라고 하지 말고, 태자(太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태자(太子)는 다음번 황제(皇帝)가 될 왕자를 뜻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사>에 태자라고 명시된 이가 11명(왕이 된 혜종, 정종, 광종 제외)이고, 후에 왕으로 추존되어 태자라고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태자로 불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도 여러 명 있다. 스물다섯 명의 아들이 모두가 태자로 불린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 황위를 이을 태자는 '정윤(正胤)'이라 불렸다. 원작과 동일하게 황자로 부르기보다 태자라고 하는 편이 좀 더 적절한 번안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원작의 설정과 같으면서 우리 역사에도 들어 맞는 황자 선정이 이런 아쉬움을 상쇄해 주었다. 태조 다음에 즉위한 혜종(惠宗) 왕무(王武)(김산유 분)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결혼한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태조의 스물다섯 아들 중 첫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도 그가 맏아들이므로 정윤이 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혜종이 가장 안쓰럽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용감하게 적진으로 쳐들어가 1등 공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약한 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혜종이 즉위 2년 만에 34살의 나이로 병이 위독하여 죽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외손자인 다른 태자들을 앞세운 호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광종의 개인사 설정은 아주 절묘하다. 신명 순성왕후 유씨에게는 태자 태(泰), 정종(定宗), 광종(光宗), 정(貞), 증통국사 이렇게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 태는 가장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첫 아들인 것 같고, <고려사>에 후손이 없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찍 죽은 것 같다.

광종이 되는 왕소(王昭)(이준기 분)가 신주(信州)에 볼모로 가 있는 것도 약간의 상상을 더 했을 뿐 역사적 근거가 있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아찬 강기주의 딸인 신주원(信州院) 부인 강씨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려서 죽었고, 광종을 양육하여 아들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광종이 개경에 있는 황실에서 자랐는지, 양어머니의 고향인 신주에서 자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왕비가 양자로 삼아 키웠다면, 정종이 되는 형 왕요(王堯)(홍종현 분)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아들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에 상상을 더한다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협하다가 아이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고, 자신의 실수에 대한 미안함과 아들에 대한 죄책감 등 복잡한 감정으로 아들을 멀리하며 다른 왕비에게 양자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꽤 설득력이 있다.

 고려로 타임슬립한 해수와 그녀를 둘러싼 8명의 꽃미남 황자들.

고려로 타임슬립한 해수와 그녀를 둘러싼 8명의 꽃미남 황자들. ⓒ SBS


여주인공과 사이가 나쁜 대목왕후

원작 소설에서는 8황자가 여주인공의 마음을 뒤흔든, 가장 멋진 남자로 나온다. <달의 연인>도 마찬가지다. 강하늘이 연기하는 8황자도 뭇 여성을 매혹시킬 만한 부드럽고 매력적이다. 태조의 태자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아서 누가 몇 번째 아들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마도 왕욱(강하늘 분)은 훗날 광종의 비가 되는 누이 대목왕후 황보씨(<달의 연인> 속 연화공주, 강한나 분) 때문에 8황자로 선정된 것 같다. <고려사>에는 왕욱의 자식이 누구고, 언제 죽었고, 어떤 시호를 받았다는 정도의 기록만 있을 뿐 성품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작가가 자유롭게 상상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그를 8황자로 선정한 것은 꽤 좋은 선택이다.

해수는 왕욱의 부인 해씨(박시은 분)의 여동생으로 설정됐다. 자연스럽게 여주인공과 황자들이 자주 부딪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훗날 광종이 되는 왕소를 두고 연적이 되는 미래의 대목왕후(연화공주)와 해수의 미리 사이도 나쁘게 설정됐다. <달의 연인> 속 대목왕후는 왕소에게는 다정하지만 꽤 성깔도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마도 나중에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할 때 이를 반대하는 등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가장 잘 설정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13황자로 설정된 왕욱(王郁)(남주혁 분)이다. 8황자 왕욱(王旭)과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원작에서는 아주 잘 생기고 풍류에 능한, 자유로운 영혼의 황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왕욱에게도 어울리는 설정이다. 왕욱(王旭)의 딸이자 경종의 왕비인 헌정왕후가 경종이 죽은 뒤, 삼촌인 왕욱과 자주 왕래하다 임신하여 현종을 낳았다. 이복남매나 삼촌-조카 사이의 혼인도 흔했던 고려지만, <고려사>에는 왕비가 부끄러워하며 아이를 낳은 후 죽었고, 왕욱은 대의를 범했기에 귀양을 갔다고 쓰여 있다. 고려의 왕욱은 글을 잘 짓고, 지리에 능통했다고만 되어 있는데, 원작 13황자 못잖은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었을까? 왕비였던 조카도 매혹시킬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 나례(儺禮) 장면이나 스치듯 지나간 세욕(洗浴)터 장면도 고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나례는 고려 3대 왕인 정종 6년에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그 전부터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드라마처럼 태조 때 궁중 행사로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넘어가 줄 수 있는 문제다. 세욕터 장면도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다녀간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사람들은 남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벗고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장면은 충실한 고증에 상상력을 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극의 전개를 지켜봐야겠으나 아직까지 고증에 큰 문제는 없는 듯하다.

형부와 처제의 사랑 

 8황자와 해수의 사랑, 해씨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시작됐으면 어땠을까?

8황자와 해수의 사랑, 해씨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시작됐으면 어땠을까? ⓒ SBS


하지만 여전히, 해수와 왕욱의 러브라인에 대한 불편함은 남는다. 전근대 사회에서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는 흔했다. 신라, 고려 시대에도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해수와 원작 속 약희는 현대인이다. 황자가 처제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들이 사는 시대를 생각한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현대인인 여주인공들이 형부에게 느끼는 감정에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온라인 반응을 보면 나와 같은 포인트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제작진도 이같은 국내 시청자들의 거부감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원작에서는 친자매로 설정된 약희-약란의 관계가 <달의 연인>에서는 6촌 자매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5회에서 해씨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욱-해수-왕소의 삼각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 기왕 원작과 차이를 두고자 했다면, 왕욱과 해수의 러브라인이 해씨 부인이 죽고난 뒤 시작됐다면 어땠을까?

드라마 때문에 뭔 호들갑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잣거리 갑남을녀가 즐기는 대중문화는 결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반들이 비속한 노랫가락과 음란한 야담(野談)이라고 했던 그것이 그 시대 대중의 의식 세계를 형성하고 당대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충분히 잘 만든 드라마임에도, 여전히 불편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달의 연인 보보경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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