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도 감아도 딸들이 보고 싶어요. 잠깐 잠 드는 시간 빼곤 늘 그리워요. 청원 서명해주신 분들께 일일이 찾아가서 큰절하고 싶어요. 정말 너무 고맙고 꿈인 것 같아. 그날 (청원이 많이 몰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자다 일어나서 이틀 동안 잠을 못 잤어요. 고맙다는 단어의 표현이 모자라죠."

지난 3일 단역배우 자매들의 어머니 장아무개씨는 하루종일 인터뷰에 응했음에도 지친 기색 없이 기자의 전화를 반갑게 맞았다. 몰려드는 인터뷰에 점심·저녁을 다 굶었지만 언론의 방문과 시민의 지지에 고마워했다. 딸이 다녔던 대학의 학보사 기자와 인터뷰도 했다. 찾아와준 딸의 후배가 고마워 더 열심히 응했다.

장씨는 "그동안 묻어뒀던 게 많았다"며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부분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전화 너머로 확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거듭 기자에게 "만나서 얘기하자"고 당부했다. 그는 "재수사를 해서 진실을 밝히고 싶다"면서 "앞으로 법정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매 죽음 후 9년 만에 도착한 공권력의 답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단연배우 자매 자살 사건 재조사 요청 청원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단연배우 자매 자살 사건 재조사 요청 청원 ⓒ 화면캡처


'단역배우 자매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 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지난 2일 22만2770명으로 마무리됐다. 이에 앞서 지난달 29일엔 이철성 경찰청장이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본청 내 감찰과 소속 경찰과 변호사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이 전날인 28일 꾸려졌다. 청와대 청원은 4월 2일이 마감시한이었지만 20만 명이 넘자, 경찰청장이 대처를 지시한 것이다. 사건 발생 14년, 자매의 죽음 이후 9년 만에 도착한 공권력의 답이었다. 

우리 사회에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면서 장자연 성접대 의혹 사건과 단역배우 자매 자살사건이 재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단역배우 자매 자살사건'은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던 언니가 업계 관계자 12명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망한 뒤 동생도 뒤따라서 자살 사망한 사건이다. 장씨의 딸들은 지난 2009년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사건이 한국사회의 관심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2년 JTBC 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다루기도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특히 자매의 억울한 사연을 몇몇 방송과 신문이 다루면서 이후 다음 포털 아고라에서 재수사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일었다. 그러나 재수사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장씨는 "꼭 원수를 갚아달라"는 작은딸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딸들을 따라가려고 시도했다가 자살예방 모임에서 만난 지인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그러던 것이 미투 운동에 힘입어 사건이 재조명됐다. 장씨는 여의도를 찾아 1인 시위를 재개하고, 유인물도 나눠줬다. 큰딸이 다녔던 대학도 찾았다. 14년 만이었다.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관심을 호소했다. 여성학을 공부한 큰딸은 장학금을 받아올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장씨는 그동안 가해자 12명의 업무 배제와 경찰 수사과정에서의 2차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가해자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실명 공개), 업계 퇴출 등 네티즌들의 요구도 빗발치고 있다.

최근 SBS와 MBC 등 방송사들은 가해자들을 자체·외주 제작에서 모두 퇴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KBS는 지난달 26일 여의도 소재 각 보조출연 기획사에 '가해자 12명을 포함해 앞으로 성폭력이 일어나면 가해자를 배제시키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확인됐다.

장씨는 "정현백 장관이 가해자들을 업체에서 일을 못하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며 "안방에 앉아서 다른 사람 내세워서 지시하면 그대로 다 일할 수 있다"고 우려를 비쳤다.

지난달 27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장씨와 만난 자리에서 관련부처와 논의해 가해자들을 기획사 업무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논의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가해자 대부분은 최근까지 관련업에 종사해왔다. 이들 중엔 기획사 대표도 있는 등 보조출연자 관리 경력이 20년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계순 전국방송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도 퇴출이 제대로 될지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계순 위원장은 "이번에 나갔다고 하는데,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전화로 피디들과 연결해서 프로그램 따서 자기가 키워둔 새끼반장한테 일을 시킬 수 있다"면서 "나간 게 나간 게 아니다. 지난 40년간 관행이라는 이름 하에 방송 3사가 무허가 파견업체들과 거래하면서 성폭력을 비롯해 각종 사고가 발생해도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질타했다.

문 위원장에 따르면 공기업인 방송사들이 지난 2016년에 노동부로부터 정식으로 파견 근로자 공급 허가를 받은 노동조합과 일하지 않고 인·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보조출연 업체와 거래하면서 제작현장에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돼왔다. 특히 노조 가입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이 만연돼 있다. 문 위원장은 자매의 성폭력 사건도 이런 큰 범주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성토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벌어진 '2차 피해'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을 다룬 JTBC <진실추적자 탐사코드> 2012년 9월 23일 방송분 '성폭력으로 풍비박산난 한 가정 - 어느 자매의 자살'의 한 장면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을 다룬 JTBC <진실추적자 탐사코드> 2012년 9월 23일 방송분 '성폭력으로 풍비박산난 한 가정 - 어느 자매의 자살'의 한 장면 ⓒ JTBC


자매의 비극은 일터에서의 위계 혹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 때문이었다.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도 더해졌다. "초심자의 위치에서 드라마 반장이라는 보직이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인가"라는 질문에 문 위원장은 "이들은 각각 소사장"이라면서 "보통 방영 6개월 전에 방송사 편성국에서 프로그램 편성이 결정되는데, 이때 담당 피디가 이런 보조출연 반장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피디가 자기 말 잘 듣는 사람에게 반장이라는 명칭을 줘서 일을 시키는 것"이라면서 "이들이 피디가 주는 프로그램을 들고 최고 대우해 주는 기획사로 찾아가는 거다. 여의도에만 기획사가 열군데다. 기획사가 사장이 아니라 반장이 소사장이다.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단역배우 자매 사건은 지난 2004년 7월에 시작됐다. 방송국 댄서로 활동했던 동생이 언니 ㄱ씨에게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권했다. 둘이 함께 촬영현장에 갔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에 동생만 먼저 왔다. 언니는 더 있고 싶다며 호기심을 보였다. 그 후 4개월간 아르바이트를 잘하는 줄로만 알았던 큰딸이 이상행동을 보였다. 입원 치료를 받은 후 업체 관계자 4명에게 성폭행을, 8명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기막힌 사실이 드러났다. 

장씨는 딸이 지목한 12명을 2005년 1월에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소했다. 조사과정에서 2차 피해가 가해졌다. 수사관은 A4용지와 자를 주면서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오라"고 요구했다. ㄱ씨는 그림을 그려 제출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루는 조사 중에 형사들이 모여들어 "어이, 12명 상대한 사람 얼굴 좀 보게 모자 벗어봐",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이게 강간이냐. 좋아서 한 거지"라고 했다. 장씨는 바로 딸을 데리고 나왔다. 경찰서 앞 8차선 도로에 딸이 뛰어들었다.

"조사를 10년은 받은 거 같다. 나는 우리 애들 죽은 날짜에 머물러 있다.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2년 가까이 조사받았다. 치료했다가 조사받으면 재발되고 해서 오래 조사받았다. 큰애가 당시에 아빠한테 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소 취하한 지도 몰랐다. 우리 애는 심신미약이었고, 약을 많이 먹었던 상태였다. 검찰에 취하를 의논하러 간 거지 취하하러 간 건 아니다."

그 후 ㄱ씨는 "나는 그들의 노리개였다. 자살만이 살 길이다. 더는 살 이유가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18분 18층에서 목숨을 끊었다. 장씨는 사망시각이 18에 맞춰진 것이 "분노에 못 이겨 나온 행동 같다"고 했다. ㄱ씨는 사망 당시 불과 서른네 살이었다. 충격을 받은 동생도 불과 6일 만에 언니 뒤를 따랐다. 동생은 엄마에게 "언니가 그날 샤워를 오래 했냐"고 묻더니, 사망 당일 샤워실에 오래 머물렀다.       

"내 딸 성폭행한 것은 반장이지만, 죽인 건 경찰"

해당 사건은 특히 2차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 2014~15년엔 네티즌 12명이 영화평론가 허지웅씨가 자매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허위사실을 반복해 인터넷에 유포했다. 이들은 허씨의 고소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허씨가 입은 허위사실 피해와는 별도로 자매의 성폭력 사건 자체를 만들어진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장씨는 "당시에 내가 직접 그런 글을 올리지 말라고 인터넷에 썼다"고 했다.

장씨가 2014년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원고 패소했다. 민법이 정한 소멸시효 3년이 지나 소가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1인 시위에 나선 장씨가 가해자 중 일부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해 2월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고, 가해자들은 항소를 포기했다.

경찰청이 진상조사단을 꾸렸지만 수사로 전환될지는 미지수다. ㄱ씨가 대질신문에서 오는 고통과 가해자들의 협박으로 고소를 취하한 데다 공소시효도 지났기 때문이다. 경찰은 사건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다시 살펴보는 한편, 당시 조사과정에서 담당 수사관들의 위법 행위가 드러나면 정식 수사로 전환할 방침이다.

경찰 내부 징계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씨는 "내 딸을 성폭행한 것은 반장들이지만, 죽인 것은 경찰이다"라며 강한 분노를 나타냈다. 당시 수사관 3명 중 2명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덧붙이는 글 해당 기사로 정신적 고통이나 우울감을 느끼시는 분은 ▲자살예방전화 1577-0199 ▲복지부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도움을 요청하시길 바랍니다.
단역배우 엑스트라 여의도 방송사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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