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3 06:49최종 업데이트 23.07.03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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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찬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책의원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지난달 28일 방송된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서 퀴어문화축제가 다시금 화두에 올랐다. 이날 방송의 주제 중 하나는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지자체장들의 차별적인 행정이었다.

여러 매체가 다루었듯 홍준표 대구시장은 대구퀴어문화축제에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했고, 실제로 축제를 방해하려다 대구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서울퀴어퍼레이드의 시청광장 사용 불허 결정에 대해 "성소수자가 하는 모든 행사가 약자로서 배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차별과 편견이 난무했던 열린광장시민운영위원회의 논의 결과를 옹호했다. (관련 기사: 
오세훈과 홍준표의 나라 망신... 부끄럽지 않나https://omn.kr/24e55)


이날 방송 출연진 중 한 사람이었던 장예찬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은 두 시장의 행보가 정치적 판단에 속하며 행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두 시장의 행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이미 많은 기사와 칼럼들이 비판했으니 이 글에서까지 반복하지는 않고자 한다. 다만 장예찬 최고위원은 두 시장의 행동을 옹호하며 "세계적으로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많이 받는다고 하지만, 과거처럼 아예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닌데 퀴어퍼레이드를 통해서 존재를 알릴 정도의 상황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TV 드라마나 영화, 특히 디즈니나 마블 같은 경우는 지나친 PC주의로 성소수자 아니면 주인공 하기 힘들어졌다는 이런 자조적인 이야기까지 나오는 마당"이라고 주장했다. 

왜 퍼레이드의 의의를 멋대로 규정하는가
 

지난 2022년 7월 16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3년 만에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 연합뉴스

 
장예찬 최고위원의 두 발언에 대해서는 확실히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성소수자의 존재조차 잘 인지되지 않던 예전에 비하면 상황이 달라진 건 맞다. 하지만 사회가 다양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중심으로 성소수자의 존재가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며 성별이분법과 유성애(有性愛)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는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보와 이해를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퍼레이드의 의의를 단순히 '존재를 알리는 것'으로 국한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는 문화행사이기도 하지만 차별과 편견이 사라진 평등한 공간을 대규모로 실현해 보는 급진적인 사회 운동이기도 하다. 참가자들은 각자가 어떤 존재이건 서로의 존재를 질문에 부치거나 축제에 함께할 자격을 묻지 않는다. 차이를 넘어 다양함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직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문화'는 퍼레이드에서 실현된다. 또한 국가와 지역에 따라 퍼레이드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기나긴 차별을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고 진일보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남은 제도적 차별을 끝내겠다는 정치적 선언이 될 수도 있다. 가져야 할 의문은 아직도 왜 퀴어퍼레이드가 있어야 하느냐가 아니다. 왜 충분히 확장될 수 있는 퀴어퍼레이드의 의미와 의의를 장예찬 최고위원이 멋대로 규정하고 한계를 설정하려 하는가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조금 더 흥미롭다. 바로 "지나친 PC주의 때문에 성소수자 아니면 주인공 하기 힘들어졌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마당"이라는 발언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는 주로 언어나 행위에 있어 특정 사회 집단에 대한 공격을 배제하고 포용성을 지향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실상 식민지 지배자의 관점을 반영한 '인디언'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미국 선주민'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정치적 올바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PC는 실천의 한 형태라 사실 'PC주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다만 PC라는 개념 자체가 긴 시간 동안 일상 속 정치적 실천을 뜻하는 것부터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긴 하느냐'는 냉소적인 자조 혹은 정치적 올바름을 실현하는 실천 자체를 비판하는 뉘앙스로 쓰이는 등 용례가 다양했다.

그렇기에 'PC는 원래 그런 말이 아니다'를 따지는 건 크게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맥락에서 PC라는 단어를 사용했듯 한국에서 통용되는 'PC주의'도 나름의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어가 내포한 주장에 동의를 하느냐는 별개의 여부이지만.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으로 소수자만 특혜? 사실일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만든 드라마 <로키>는 주인공 로키를 양성애자 캐릭터로 설정했다. ⓒ 디즈니+


그런데 이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게 추구되어 특히 대중매체에서 성소수자들이 더 우대받고 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 위원이 언급한 것처럼 특히나 미국 대중매체의 최근 캐스팅 경향을 놓고 이런 주장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미국 쪽 자료를 살펴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이는 슬프게도 소위 'PC주의'가 고까운 사람들이 적용할 국내의 사례가 거의 전무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의 비정부 미디어 모니터링 기구인 글라드(GLAAD)가 발표한 2022 스튜디오 책임 지수(Studio Responsibility Index, SRI)에는 주요 일곱 개의 대형 스튜디오가 배급한 영화에 성소수자 캐릭터가 얼마가 등장했는지 정리되어 있다. 조사에 따르면 2021년 주요 스튜디오들이 배급한 77편의 영화 중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한 작품은 16편이었다. 그러니까 80%에 달하는 작품들에 성소수자 캐릭터는 등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정도면 '주인공으로 캐스팅조차 어렵다는 자조'는 그냥 엄살에 불과한 게 아닐까.

구체적인 통계로 들어가 보자. 그나마도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한 작품들 중 이들이 5분 미만의 시간 동안 모습을 비추는 영화가 총 60%에 달했다. 1분 미만을 찾으면 21%이다. 여기에 성소수자 캐릭터 중 남성 동성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데 반해 양성애자가 등장한 작품은 두 편, 트랜스젠더가 나온 작품은 한편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 기간인 2021년이 아직 코로나 19 대유행의 영향아래 놓여있어서 배급되는 작품의 수가 많지 않았다고 하여도 그렇게 인상적인 숫자는 아니다. 

달라진 세상, 사회는 성소수자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2021년 3월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나 있다 -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기자회견'이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성소수자부모모임, 청소년트랜스젠더인권모임 튤립연대 등 관련 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통계가 있다. 2022년 갤럽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응답한 미국인이 통계의 7.1%에 해당했다. 2012년 3.5%에 비해 두 배가 뛴 셈인데 1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통계의 다른 부분이 보여준다.

'Z세대'로 호명되는 1997부터 2003년생까지의 인구의 경우 20%가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답했다. 이는 1981년에서 1996년대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두 배에 달한다. 사실 밀레니얼 세대의 10%도 적은 수치는 아니다. 갤럽의 조사가 유독 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비슷한 시기 수행된 다른 조사들도 1~2%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경향이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갑자기 성소수자가 늘어난 것일까. 그보다는 오랜 시간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성소수자의 존재가 알려지고 정확한 정보들이 전파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새로운 언어를 찾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현실에 비해 여전히 미미하지만 미디어 속 성소수자 캐릭터가 점차 늘어나는 건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영화사들이 딱히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한 것뿐이다. 한 세대의 20%를 차지하는 존재가 대중매체에서 아예 안 보인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에 당연히 성소수자들도 미디어에서 자신이 훨씬 더 잘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를 보기를 원하는 건 덤이다. 그리고 그들도 주요 관객 집단 중 하나다.

달라진 세상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세상이 너희 존재를 아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할 것인가. 대중매체에 너희가 등장하는 건 특혜라고 할 것인가. 그러니 어떤 문화적, 사회적, 감정적 욕구도 억누르고 그저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라 할 것인가.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사람에게 누구도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즉 차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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