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2 07:30최종 업데이트 23.10.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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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추석인 9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원폭 피해 동포 오찬 간담회에서 권준오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의 답사를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구속영장 기각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일 것이다. 대통령실에서 며칠째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하는 게 그 징표다. 비서관·행정관들에게 "이 대표와 관련해선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렸다는 것을 보면 그 충격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대다수 참모가 영장 발부를 기정사실로 여겼다고 하니 내부의 기류가 꽤 불편한 건 사실인 것 같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 이 대표를 '확정적 중범죄 후보'라고 지칭한 바 있다. 당시는 대장동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때였다. 자신이 보기엔 분명한 중범죄자인데 구속이 안 되고 풀려난 상황을 윤 대통령으로선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개인이 믿는 신념과 실제로 나타난 현실과의 차이에서 생기는 인지 부조화 현상에 윤 대통령이 빠져있지 않을까 싶다.


윤 대통령의 이 대표에 대한 고정관념은 오랜 특수부 검사로서의 정치적 '촉'이 발동된 탓이다. 검찰은 어느 정권이든 권력의 편에 서서 정치적 반대자를 범죄자로 단죄하는데 능수능란하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에 대한 의혹만으로 전방위 압수수색을 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용지물로 만든 게 단적인 예다. 당시 검찰에 제기된 비판이 "검찰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우려였다.

이 대표 영장 기각 직후 나온 검찰 반응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사법은 정치적 문제로 변질되어서도 안 되고 정치적 문제로 변질될 수도 없고 또 변질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사법을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판을 키운 게 바로 검찰 아닌가. 얼마든지 정상적인 절차와 과정을 거쳐 수사할 수 있는데도 표적을 정하면 사냥하듯이 끝장을 보려는 행태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검찰의 생각은 윤 대통령의 뜻과 얼마나 다를지도 의문이다.

윤 대통령은 그간 국정 운영 동력의 상당 부분을 이재명과 문재인 정부 때리기에 의존해왔다. 대선 승리 때부터 써오던 전략을 집권하고서도 토씨 하나 안 고치고 답습했다. 그렇게만 하면 대다수 국민이 계속 환호하고 지지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정권을 잡았으면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개혁에 줄달음치는 게 정상이다. 무능하고 준비없는 정권의 맨얼굴을 그렇게 가려왔다.

국정 기조 전면 쇄신 필요... 그 첫 걸음 이재명 대표 인정하는 것 

이 대표 구속 실패는 더 이상 그런 얄팍한 국정 운영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검찰을 정권의 보위 수단으로 이용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이다. 지금도 전국 주요 지역의 검찰청에선 전 정부와 관련된 수십 건의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감사원은 검찰의 전위대로 나서 수사의 불쏘시개를 던져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기관을 동원한 이런 전근대적인 통치 방식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국정 기조를 전면 쇄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걸음은 이재명 대표를 인정하는 것이다. 때마침 이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민생 영수회담'을 제안했지만 국민의힘은 "격에도 맞지 않고 형사 피고인으로서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신분세탁 회담"이라고 뭉갰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앞서 국회에서 "(영수회담) 그 것은 대단히 언페어(불공정)한 그러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여전히 이 대표를 '확정적 범죄자'로 보는 듯하다. '범죄자 프레임'를 포기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언제까지 자신의 처가와 측근들의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눈감고 야당에 대해서만 이중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대통령이 집권 1년 반이 지나도록 야당 대표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은 어떤 명분을 대든 설득력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를 보는 쪽은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도 이제 현실을 깨달을 때가 됐다.  
 
덧붙이는 글 <이충재의 인사이트>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매일 아침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던 이충재 기자는 오랜 기자 경험을 토대로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우리 사회 현안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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