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0 16:02최종 업데이트 23.11.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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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한 사람과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선생님이 와 특강을 한다길래, 쓰신 책을 미리 읽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렸어요. 저는 잉크병 안에 스펀지를 넣고 펜촉으로 찍어가며 쓴 펜글씨 책 한 권을 방학 숙제로 내던 세대예요. 엄지와 검지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요즘의 아이들이 선생님을 통해 어떤 감흥을 느낄지 궁금했어요.

강연 당일, 맨 뒷자리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들었어요. 만년필을 처음 접한 연유부터 수리공의 길을 걷게 된 계기, 또 그 여정을 글로 써 책으로 엮게 된 사연에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모였다 갈라지고, 이내 굽이쳤다 다시 잔잔해지는 인생 이야기를 편하고도 쉽게 들려주시더라고요. 십인십색 백인백색의 아이들이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생각을 가슴속에 품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올 상반기 만년필 동아리가 있는 전북 김제의 지평선고등학교에서 만년필 강연을 한 후, 그날의 일을 글로 썼습니다. 첫 번째 글은 학교, 학생, 학부모 중 학교를 대표하는 교사의 입장에서 본 시선입니다. 막상 쓰고 보니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의 목소리도 듣는 게 마땅하다 싶어 두 번째 이야기로 실었습니다. 그즈음, 강연을 참관했던 학부모 한 분이 위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관련기사]
만년필 동아리가 있다고? 거짓말 같았던 고등학교 https://omn.kr/24icb
다양성을 존중할 때 피로감이 사라집니다 https://omn.kr/25hnc

모나미는 1960년 문을 연 광신화학공업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회사 창립 3년 뒤인 1963년 5월 1일, 불세출의 명작 153 볼펜을 출시했지요. 흰색 몸체는 육각이라 충격에 강하고, 심이 나오는 앞부분과 뒤쪽 노크는 검은색이어서 잉크가 묻어도 쉽게 표가 나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볼펜을 흔하디흔한 필기구로 취급합니다만, 1960년대 초반까지는 다들 펜촉을 잉크에 찍어가며 글씨를 썼습니다.

그 시절, 유리로 된 병잉크와 마개 사이를 밀폐하는 기술력이 아무래도 지금보단 덜했겠지요. 또 요즘이야 혹여 병이 넘어져 안에 든 잉크가 새기라도 하면 옷을 버리는 게 염려되지만, 물자가 부족하던 그때는 손이 검어지든 말든 새어 나온 잉크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게 몇 곱절 속상했을 겁니다.

그래서 병잉크 안에 스펀지를 넣어 쓰곤 했습니다. 입구를 막은 스펀지의 용도는 잉크를 일정량 머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펜촉을 갖다 대었을 때만 잉크가 스며 나오고, 설령 실수로 병을 넘어뜨려도 잠시 버텨주니 얼른 다시 세우면 그뿐이지요. 그렇대도 병잉크에 펜촉을 찍어가며 쓰는 방식은 분명 번거롭습니다.
 

딥펜은 펜촉을 병잉크에 담가 잉크를 찍어 쓰는 필기구를 통칭합니다 ⓒ 김덕래


모나미 볼펜 나이가 어느새 60세입니다. 볼펜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병잉크와 펜촉을 갖고 다녀야 했는데, 이젠 또 다른 필요에 의해 딥펜과 글라스펜, 그리고 만년필 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샤프는 심의 굵기가 원체 가늘어 처음과 쓰는 도중의 차이를 잘 못 느끼나, 연필은 쓰면 쓸수록 심이 뭉툭하게 닳아 긋는 선이 점차 굵어집니다. 볼펜은 가장 다루기 수월한 필기구지만 그런 만큼 각별함도 덜합니다.

샤프와 연필이 말귀를 곧잘 알아듣는 아이라면, 볼펜은 말 한 마디를 건네었을 때 가르친 그대로 행하는 모범생에 가깝습니다. 잔소리할 이유도 없지만, 미운 정 고운 정 주고받은 과정이 없어 그저 대견할 뿐입니다.

반면 딥펜이나 글라스펜은 각자의 이유로 성가십니다. 잉크를 계속 찍어가며 써야 하고, 자칫 떨어뜨리면 유리로 된 촉이나 축이 깨질 수 있어 제법 신경이 쓰입니다. 여러 번 말을 해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선을 거두기 힘들고, 또 그만큼 기억에 남습니다.

그중 가장 손이 가는 건 역시나 만년필입니다. 말을 듣기는커녕, 언제 문젯거리를 만들지 알 수가 없어 계속 주시해야 합니다. 내가 살가운 한 마디를 먼저 건네었을 때 맹숭맹숭하게라도 화답을 해주면 좋으련만,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리더라도 그러려니 하련만, 되레 말꼬리를 잡고 뾰족하게 받아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만년필의 매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 한마디론 부족하겠지... 두 마디 세 마디 계속 동글동글하게 말아 건네보자... 그러다 보면 상대방의 목소리 톤도 슬몃 낮아지고, 말에 스민 독기도 서서히 빠집니다. 관계 맺음의 과정이 보태지면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해집니다.
 

좌측 하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딥펜, 글라스펜, 만년필, 샤프, 연필 그리고 가운데 모나미 153 볼펜 ⓒ 김덕래

 
"온갖 종류의 필기구와 스마트 기기를 쉽게 접할 수 세상이에요. 집집마다 노트북과 프린터가 갖추어진 지 오래인 걸 넘어 스마트펜이 일반화된 시대인데, 체온으로 가다듬고 느리게 적어내는 만년필에 아이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게 신기했어요.

참 묘하지요? 선생님 이야기에 빠져들어 앞다퉈 궁금한 걸 물어보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반갑더라고요. 사물에 깃든 작은 사연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손품을 들여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 왜 의미가 있는지 아는 것 같았어요.

남보다 빨리 앞서 나아가야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도 꾸준히만 가면 중간중간 쉼터가 나오기 마련이고, 거기서 잠시 쉬었다 다시 가는 삶의 방식도 틀린 게 아니란 걸 아이들이 알아챈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급히 서둘러 외출할 때 꼭 뭔가 하나 빼먹는 것처럼, 빠름만을 추구했을 때 분명 놓치는 게 있다는 걸 사실 우리는 다 알잖아요."


이달 초 1~2일, 그랜드워커힐서울에서 'New Wave : AI와 빅블러 시대의 인재혁명'이라는 주제로 '글로벌인재포럼 2023'이 열렸습니다.

유하 시필레 전 핀란드 총리의 기조연설을 포함한 총 25개 세션이 이틀간 진행되었고, 5000여명의 참관객이 다녀갔습니다. 국내외 각분야 전문가들로 꾸려진 좌장과 연사들이 세션 주제에 맞춰 자신의 목소리를 냈고, 불확실성이 큰 미래에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책은 '인재 양성'이라 입을 모았습니다.
 

'예술과 AI, 그리고 인간' 세션에서 발표 중인 이진준 한국과학기술원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 김덕래


둘째 날 정제영 교수를 좌장으로 '빅블러 시대의 융합과 창의 인재 육성 방안'에 대한 세션이 열렸고, 연사로 나선 이환철 단장에게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에 관해 물었습니다.

"몸에 좋다고 한 가지 영양소만 집중적으로 섭취하면, 다른 영양소가 부족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른바 교육 선진국인 스웨덴을 비롯해 캐나다, 네덜란드, 핀란드 같은 나라들은 디지털 전환을 원점에서 재논의하고, 손글씨 쓰기를 필수 교육과정으로 되살리는 등 아날로그 교육에도 관심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25년부터 디지털교과서 도입이 예정되어 있는데, 세계 교육 선진국들의 변화에 맞춰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지, 또 진행시 위험요소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궁금합니다."

디지털교과서 도입의 핵심 목적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AI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미래형 인재를 키워내자는 데 있으며, 인류 생태계가 첨단화 되어 갈수록 사람의 인성이 더욱 강조될 거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AI의 영향으로 2027년까지 1400만개의 일자리 소멸을 예상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낙심하기엔 이릅니다.
 

디지털교과서 도입 관련 답변중인 이환철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창의인재단 단장 ⓒ 김덕래

 
2일 오후 마지막 세션에서는, 김영철 한국연구재단 사무총장을 좌장으로 'AI시대의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 다뤘습니다. 어떻게 하면 AI를 효과적으로 관리 감독할 수 있을지 논의하고, 인문학의 본질은 역시나 문해력에 있음을 재확인한 세션의 끝맺음은, 놀랍게도 좌장이 청중에게 들려주는 시 한 편이었습니다.

2020년, 섬마을인생학교 13기 교사로서 도초고등학교 2학년 학생 50여명과 수학여행을 함께 했을 때, 어느 남학생이 지긋이 눈을 감고 암송했던 바로 그 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3년 전 그 고등학생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방문객과 김영철 사무총장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방문객 위에, 지평선고등학교 학부모가 보내온 편지글이 겹쳐졌습니다.

"한 사람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꽤 어마어마한 까닭은, 그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그것도 그의 온 일생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인 거겠지요? 누군가의 가치를 어떻게 가벼이 말할 수 있겠어요. 설령 주목받지 않는 인생일지언정 한 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마주하는 자리는 분명 의미 있다 생각해요. 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서로 다른 적군이 아닌 같은 편입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관계가 그렇고, 학부모와 교사간이 그러하며, 교사와 학생 사이가 다르지 않습니다. 누르고 올라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힘 보태야 할 동료입니다. 미래 사회로 가면 갈수록 분야간 협업이 중요해집니다. 홀로 고고하던 시절은 이미 갔습니다. 융합해 함께 나아갈 때 비로소 항구적인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AI가 우리의 지능을 뛰어넘는 날이 오더라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위로, 진심, 격려, 공감... 이렇게 너무 달달하고 말랑해 가치 없어 보이던 것들이 귀한 대접 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사람 본연의 가치가 폄하되는 세상이 유지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미래형 인재 육성 방안을 논의하는 포럼의 대미를 장식한 시 한 편,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 김덕래

덧붙이는 글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교육 대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매일 부대끼며 앞에서 이끄는 교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한복판에 서 있는 학생의 어깨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교사가 학생의 손을 잡고 당길 때, 자녀의 등을 밀어주는 역할은 부모의 몫입니다. 각자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융합의 과정을 거쳐 함께 나아갈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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