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3 11:37최종 업데이트 23.12.2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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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남편과 일본의 소도시 다카마쓰에 여행을 갔던 때였다. 하루는 다카마쓰 도심을 벗어나 변두리 지역에 가기로 했다. 어떻게 가야 할지 버스를 알아보고 있는데, 이게 참 헷갈리는 노릇이었다. 같은 번호 버스가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이 있고,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도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정류장에 있는 노선도를 더듬거리다가, 드디어 우리는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버스를 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마침 우리 앞에 '시계방향'으로 도는 버스가 도착했다. 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이 나섰다. 버스 문이 열린 틈을 타, 남편은 굳이 버스 운전사에게 "OO로 가고 싶은데, 이 버스를 타는 게 맞나요?"라고 큰 소리로 문의한 것. 버스 안이 일순간 술렁였다.


그런데 한 승객이 벌떡 일어나더니 버스 기사와 다른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아예 버스에서 내리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우리에게 버스 노선도를 직접 손으로 짚어가며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버스를 타라고 말해준 후,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도, 승객들도 모두가 조용히 기다려주는 모습은 내게 '충격적인 친절함'으로 다가왔다.

일본인론(論)에서 종종 보이는 말이 있다. 바로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다. 다테마에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며, 혼네는 그 안에 감춰진 속마음을 뜻한다. 즉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르고 공개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진심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남편 같은 외국인에게 버스 노선을 알려주려고 버스에서 잠깐 내린 일본인 승객의 행동은 '다테마에'인 것인가? 그녀의 '혼네'는 "이 멍청한 외국인들, 일본어도 읽을 줄 못하면서 뭐하러 여기 왔어?"였던 걸까?

군중을 두려워하고 경멸한 앙소르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라면,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일본인의 친절함에 섣불리 감동하면 안 된다며 '다테마에'에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고 엄중히 경고했을 것이다.

앙소르는 일평생 사람들의 위선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면 그림'을 통해 위선에 대한 경멸과 공포의 감정을 꾸준히 표현했다. 1899년에 그린 자화상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도 그중 하나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 1899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 제임스 앙소르

   
그림 가운데에 깃털과 꽃으로 장식된 빨간색 모자를 쓴 앙소르가 있다. 그런데 그의 주위엔 기괴하고 흉측한 가면을 쓴 인물들이 빈틈없이 둘러선 모습이다. 혼자 민낯으로 선 앙소르는 마치 가면들에게 포위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다. 침착하게 눈을 돌려 캔버스 밖을 바라보는 앙소르는 우리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앙소르는 어릴 때부터 가면이 익숙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의 집이 가면을 파는 가게였기 때문이다. 앙소르가 태어난 곳은 매년 카니발이 열리던 관광도시 벨기에 오스텐데. 그의 집은 여름마다 몰려오는 관광객들에게 조개껍데기, 가면, 반짝이, 축제 의상 등 신기하고 재미있는 축제용 기념품을 팔았다.

훗날 앙소르는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조개 진주층의 춤추듯 가물거리는 반사광과 바다 괴물의 기괴한 뼈다귀와 식물들 사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아련히 회상하곤 했다. 이 어린 시절은 앙소르를 화려한 가면이 등장하는, 환상적이고도 기이한 세계를 그리는 어른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앙소르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1892년 친구인 외젠 드 몰데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했다.

"앙소르는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그의 작품을 본 관람객들은 역겹다며 아우성쳤다. 마치 달을 보고 짖는 한무리의 배고픈 개들처럼."

앙소르는 의기소침해졌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앙소르 자신은 '핍박받는 천재'였다. 돌이켜 보면 늘 그랬다. 브뤼셀 왕립아카데미에서 앙소르를 가르친 선생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석고상 얼굴을 특이하게도 분홍색으로 칠하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으로 칠한 그를 '무식하다'고 비난했고, 가족들도 "기념품 가게에서 팔 수 있는 무난한 그림만 그리라"며 강요했다.

평론가는 그의 그림을 '쓰레기'라고 혹평했고, 여성과의 연애도 순탄치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전시회를 열면 사람이 얼마나 그림을 보러올지 불안해하기도 했다. 1895년 친구 폴 드 몽에게 보낸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말수가 적고 완고한 오스텐데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래밭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적의에 찬 대중, 그들은 예술을 싫어한다. 작년에 오스텐데 사람 30명이 전시회를 보러왔을 뿐이다. 올해는 31명이나 될까."

이런 상황이었으니 앙소르가 군중을 두려워하고 경멸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여러 비판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의 부드러운 얼굴 뒤에는 타인을 상처 주는 잔인한 본성이 감춰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에서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착한 척 순진한 척하고 있지만, 본성이 워낙 추악하기에 민낯을 감춘 가면마저도 징그럽게 변한 모습이다. 오로지 한 사람, 앙소르만이 맨얼굴로 당당히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가면 따위 필요 없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자신했을 것이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실체

그런데 과연, 앙소르는 실제로 솔직한 사람이었을까? 앙소르는 29살이던 해, 지인들도 놀랄 정도로 신랄하게 세상을 풍자한 작품을 그렸다. 1899년 작 <정책적인 영양 보급>을 보자. 
 

제임스 앙소르, <정책적인 영양 보급> 1899년, 에칭에 채색, 미국 로스앤젤레스 주립미술관 ⓒ 제임스 앙소르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재위 1865~1909)와 군대, 교회, 정부의 대표자들이 담장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이 기득권자들은 당시 사회의 진보 세력이 요구하고 있던 '의무 교육', '보통 선거' 플래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담장 아래로 더러운 대변을 쏟아낼 뿐이다.

문제는 담장 아래에 있는 군중들. 이들은 입을 벌리고 이 배설물이 영양분이 가득한 음식이라는 듯 받아먹고 있는 모습이다. 앙소르는 이처럼 '필터 따위 없이' 벨기에 사회의 민낯을 희화화했다. 사람들이 "앙소르의 표현방식은 유치하고 저속하다"라고 비판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보이지 않는 훈장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에 벌어졌다. 1929년 앙소르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정책적인 영양 보급>의 인쇄본을 찾아 황급하게 파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의 앙소르는 조롱만 받았던 그 옛날의 앙소르가 아니었다.

1920년 브뤼셀 지루화랑이 앙소르 회고전을 개최해 성공을 거둔 이래, 그는 이미 거장으로 우뚝 선 상태였다. 마침내 벨기에 왕 알베르 1세가 앙소르에게 남작 작위까지 수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앙소르는 조급해졌다. 왕실을 공격했던 자신의 '흑역사'를 얼른 지워야 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솔직한 본심'은 무엇이었던 걸까. 어쩌면 앙소르야말로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않는 냉정한 세상에 대해 보복하기 위한 '위선의 가면'을 써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막힘 없이 비아냥과 조롱을 날리는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는 훈장이 아니라 가면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앙소르의 모순된 삶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쓰는 '사회적 가면'과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쓰는 '이기적 가면'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의 저자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사회적 가면'은 인간이 적절하게 발달시켜온 기술이고, 고도로 발달한 사회성"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중요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 거짓된 자기를 보이기 싫다며 집에서 하던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무례한 일일 것이다.

이 같은 가면의 장점을 간과했던 앙소르는 솔직함과 무례함 사이의 경계도 너무도 자유로이 오갔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고 자처했기에, 앙소르는 자주 사납게 성질을 부리며 타인의 평화로운 일상을 헤집곤 했다. 갑작스럽게 공격적으로 돌변하기 일쑤였고 한번 터진 분노는 며칠 동안 가라앉질 않았다.

집 밖에서 기분 상한 일이 있으면, 집에 있는 피아노가 수난을 겪었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쾅쾅 사정없이 내리칠 때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솔직함이 아니라 적절한 '사회적 가면'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약하고 모순적이라서

다카마쓰의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의 속마음은 짜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약속 시간이 급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고, 그래서 속으로는 욕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혼네였다면? 사실, 상관없다. 그들이 속으로야 어떻게든 생각하든, 일단 내게 따뜻함과 고마움이라는 귀한 감정을 안겨줬던 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친절함이었으니까.

누군가는 그것을 가면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게 진짜 선한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타인에 대해 친절과 예의를 갖추는 것을 '위선'과 '가식'으로 폄훼하는 것은,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소중하게 가꾸어온 문명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본심과 솔직함을 내보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위선자'를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게 문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바로 십계명에서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끊임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온 살인자들의 후예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말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말이다. 옛날부터 얼마나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났으면, 기원전 13세기에 만들어진 십계명에 따로 언급될 정도였겠는가.

그렇다. 우리의 본성은 악한 구석이 많다. 그리고 앙소르의 삶이 증명하듯 약하고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의 본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단속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위선이고 가면일지 몰라도, 말투를 다듬고 행동을 다듬는 세월이 오래 쌓이면 그것이 결국에는 나의 인격이 될 것이기에.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제임스 앙소르>, 울리케 베크르 말로르니 지음, 윤채영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6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지음, 김영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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