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7 10:13최종 업데이트 23.12.2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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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어린 딸이 당신에게
자신이 예쁘냐고 묻는다면
마치 마룻바닥으로 추락하는 와인잔 같이
당신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겠지.
당신은 마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야.
당연히 예쁘지, 우리 딸. 물어볼 필요도 없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발톱을 치켜세운 한편으로는
그래 당신은
딸아이의 양어깨를 붙들고서는
심연과도 같은 딸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는
메아리가 되돌아올 때까지 들여다보고는
그러고는 말하겠지.
예쁠 필요 없단다. 예뻐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건 네 의무가 아니란다.
 
미국의 시인 케이틀린 시엘(Caitlyn Siehl)의 '그건 네 의무가 아니란다'(It is not your job)라는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접했던 것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한쪽 눈으로 이 시를 훑으며 다른 눈으로는 딸을 흘깃거렸다. 이 시 속의 엄마처럼 딸의 양어깨를 붙들고 '예쁠 필요 없단다'라고 부르짖을 날이 혹시 나한테도 있을까,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망아지처럼 천방지축 뛰어다니기 바빴던 딸이었기에, 별걱정 없이 잊고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결국은, 내게도 그날이 왔다. 산발을 한 채 피구를 즐기던 큰아이는 어느덧 화장실 거울 앞에 오래 붙어있는 사춘기가 되었다. 하루는 아이의 눈이 평소보다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황급히 등교하려는 아이를 붙잡고 봤더니, 쌍꺼풀 테이프가 엉성하게 눈꺼풀에 붙어있었다. 나는 냅다 소리쳤다.

"야, 네 눈이 어때서! 지금도 충분히 예쁜데!"

나와 작은 아이는 쌍꺼풀이 있고, 큰아이는 아빠를 닮아 외꺼풀이다. 아이는 평소 아빠와 비슷한 눈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인기 아이돌도 모두 쌍꺼풀에 큰 눈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깟 쌍꺼풀이 뭐길래.

외모에 불만이 많았던 앤디 워홀

미국의 화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도 우리 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유독 병약했던 그는 급기야 8살 때 신경질환인 무도병에 걸려 10주 동안 몸져누운 적이 있었다.

다행히 회복했지만 대신 뺨에는 붉은 자국이 길쭉하게 생겼고, 등과 가슴, 팔과 손엔 적갈색 반점들이 흔적으로 남았다. 게다가 유난히 창백한 피부를 가졌던 그는 여드름마저 심해 10대 때 이미 '딸기코 앤디'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건 무슨 상관인가. 남의 외모를 놀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못생긴 내면을 가졌는지' 스스로가 증거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워홀 스스로가 자신의 외모를 가혹하게 평가했던 데에 있었다. 워홀이 자신의 외모를 어떤 식으로 바라봤는지는 1956년의 여권 사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코를 얇게 만들고 머리숱을 더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앤디 워홀의 여권 사진 원본(왼쪽)과 코와 머리에 변형을 가한 여권 사진(오른쪽) 1956년, 젤라틴 실버 프린트, 미국 피츠버그 앤디 워홀 미술관 ⓒ 미국 피츠버그 앤디 워홀 미술관


하지만 외모 콤플렉스가 있거나 말거나. 어쨌든 워홀은 성공한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실력 덕분이었다. '현대 미술의 메카' 뉴욕에 진출해, <캠벨 수프 통조림>과 <마릴린 먼로> 등 일련의 실크 스크린 작품으로 단숨에 '팝아트의 선구자' 지위로 올라선 것이다.

그러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미지도 스스로 창조하기 시작했다. 검은 폴라 스웨터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첼시 부츠, 선글라스를 자신의 패션 코드로 삼고, 머리엔 은빛 가발을 써서 20대부터 현저히 줄어든 머리숱을 감췄다. 그는 이 모습이야말로 '미국 팝아트의 제왕'이라는 화려한 명성에 걸맞은 외모라고 생각했으리라.

워홀의 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나는 나 자신을 모아 붙였다"(I glued myself together)였다. 그는 매일 카메라 앞에 나설 준비가 된 '완성품 앤디'를 조합하는 작업을 했다. 울긋불긋한 피부와 여드름 자국을 감추기 위해 공들여 화장한 후,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가발을 머리에 붙이면 비로소 공공 버전 앤디가 되었다. 과연 미국의 철학자 스티븐 샤비로가 다음과 같이 평가할 만했다.

"워홀이 예술 분야에서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그 자신이다. 공허하고 매혹적인, 그래서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인물로 스스로를 완전히 재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앤디 워홀, <캠벨 수프 통조림> 1962년, 캔버스에 아크릴, 뉴욕현대미술관. 2023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 SACK, Seoul


재밌는 건, 누구나 이 같은 복장을 하면 앤디 워홀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캠벨 수프 통조림을 실크 스크린으로 복제 반복해 그렸듯이, 그는 자신의 모습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복제할 수 있는 대중적 이미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모두가 앤디 워홀처럼 보일 수 있었기에 진짜 워홀은 그 이미지 속으로 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외모 콤플렉스를 의식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1967년에는 이 복제 가능한 외모와 관련한 시끌벅적한 해프닝도 있었다. 워홀이 유명해지자 미국 여러 대학에서 강연 초청이 쇄도했는데, 이때 그는 배우 앨런 미제트를 자신의 대타로 삼아 강연장에 세운 것이다. 미제트를 워홀처럼 보이게 하기란 무척 쉬웠다. 선글라스와 흰색 가발만 씌우면 됐기 때문이다. 이 '대타 강연'은 무려 4개월 동안이나 지속됐다.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기자들이 물어볼 때면, '공공 버전 앤디'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만큼 그는 평소 타인이 지나치게 가까이 오는 것도, 자신을 속속들이 알려고 드는 것도 싫어했다. 워홀과 가까이 지냈던 배우 비바가 다음과 같이 증언할 정도였다.

"앤디를 만지려고 하면 할수록 앤디는 움츠러들었다. 여러 번 나는 앤디를 장난삼아 붙잡고 만지려 했지만, 그는 뒷걸음치며 우는소리를 했다. '오, 비바, 제발, 제발' 우리 모두는 얼굴이 빨개지며 뒷걸음치는 그를 보려고 앤디를 만졌다. 자신 속으로 숨어드는 전설 속의 바이올렛 꽃처럼."

비바의 말처럼 워홀은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에 숨어들어, 혹시나 외모 콤플렉스가 들킬까 숨죽이고 있는 외로운 소년과 다름없었다. 

피격 사건으로 달라진 행보
 

앤디 워홀(왼쪽)과 그의 대타 역할을 했던 배우 앨런 미제트(오른쪽) ⓒ 앤디 워홀, 앨런 미제트


워홀은 그렇게 늙은 소년으로 일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자기 모습을 부인하고 혐오한 채, 혹여 민낯을 들킬까 봐 평생 조바심 내며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치 못한 길에 우리를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워홀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을 늘 보호해줄 것 같았던 껍질이 허망하게 부서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968년 6월 3일, 워홀의 작업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총알 하나가 워홀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폐를 관통하고 식도, 쓸개, 간, 비장 그리고 장을 뚫은 후, 왼쪽 옆구리로 빠져나가면서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즉각 병원으로 옮겨진 워홀은 6시간이 걸린 대수술을 받고서야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후유증은 오래갔다. 완쾌해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는 데 무려 1년 3개월이 걸렸으며, 총상 때문에 생긴 탈장을 평생 고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 끼는 코르셋을 입어야만 했다. 워홀에게 총을 쏜 이는 발레리 솔라나스.

워홀이 제작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자 작가였던 솔라나스는 "워홀이 나의 인생을 너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쏘았다고 고백했다. 워홀은 자신을 빛나게 했던 성공이 자신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몸을 파괴할지 미처 예상이나 했을까?
     

앨리스 닐, <앤디 워홀> 1970년, 리넨에 유화와 아크릴물감, 뉴욕휘트니미술관 ⓒ 뉴욕휘트니미술관

     
워홀의 몸은 처절하게 부서졌다. 그런데 그 이후 워홀은 의외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신비주의를 고수해왔던 그가 피격 사건 2년 후, 자신의 취약성을 놀랍게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 증거는 미국의 초상화가 앨리스 닐(Alice Neel, 1900~1984)이 그린 앤디 워홀의 초상으로 남았다.

워홀은 그동안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부속품을 하나하나 떼어낸 후, 침대에 앉아 셔츠를 벗었다. 이때 그는 더이상 복제 가능했던 스타 앤디 워홀의 모습이 아니다. 좁은 어깨, 깡마른 다리, 늘어진 가슴은 그가 죽도록 감추고 싶어했던 자신이다.

이제는 그에 더해 배에 참혹하게 남은 수술 흉터와 배 부분을 고정해주는 의료용 코르셋마저 그대로 내보인다. 손을 마주 잡은 채 다소곳이 앉은 워홀은 눈을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장 그 추한 모습을 치우고, 화려했던 앤디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상상했을까.

하지만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오히려 '성자 같아 보인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무방비한 몸을 담담하게 드러낸 워홀을 보며, 반쯤 벌거벗겨진 채 기둥에 묶여 무수한 화살을 기꺼이 맞았던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떠올린 것이다. 관객들은 어쩌면 필사적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은폐하느라 생을 바친 그가, 마침내 기꺼이 '항복 선언'한 것을 그림에서 읽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워홀의 화려한 외모가 아니라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그의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워홀이 드러낸 용기는 그동안 자신이 달성해왔던 예술적 성취를 믿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쁠 필요 없단다"

외모집착에서 서서히 벗어난 앤디 워홀과는 달리 우리 아이의 상태는 더 심각해져 갔다. 하루는 아이의 눈이 벌게져 있었다. 필사적으로 '괜찮다'는 아이의 제지를 뚫고 봤더니 눈꺼풀에 빨간 상처가 있었다. 아이는 쌍꺼풀진 눈이 갖고 싶어서 눈 위를 긁어내다 급기야 상처까지 냈던 것. "너는 원래 그 상태로도 예뻐"라는 말은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은 러네이 엥겔른의 책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많은 부모가 본능적으로 딸들에게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줌으로써 기를 세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모에 대한 칭찬은 소녀와 여성이 자신의 외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킬 뿐이다."

즉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말은 여전히 아름다움과 행복을 연결 지으며, 오히려 여성이 외모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히려 딸에게 필요한 말은 ​'아름다움 이외의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일 터이다. 외모보다는 딸이 평소 좋아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히 집중하는지, 용기 있는지, 배려하는지, 창조적인지, 너그러운지 알고 있다고 지치지 않고 말하기. 그러면 외모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까.

앤디 워홀이 40대 때야 깨달은 사실을 지금 알 수 있을까. 누군가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노력할 뿐이다. 케이틀린 시엘의 시를 되풀이해 읽으며 말이다. "예쁠 필요 없단다. 그건 네 의무가 아니란다."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상상병 환자들>, 브라이언 딜런 지음, 이문희 옮김, 작가정신, 2015
<앤디 워홀>, 클라우스 호네프 지음, 최성욱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6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지음, 김문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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