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아니면 극장 갈 이유 없다던 나의 신념은 상영 30분 만에 무너졌다. 그것도 순전히 자발적으로. 애초에 그 영화를 보면서 왜 팝콘을 샀냐고? 하필 무료 쿠폰이 있었고 착실히 한국사 교육을 밟은 세대지만, 그 시절 어른들은 현대사 파트를 두고 맹렬히 논쟁했고(지금도 마찬가지다) 중립적인 인물로 가르치겠다는 목적하에 중요한 내용을 빠뜨렸다. 그렇게 파편화된 배움은 내게 '그의 전기 영화를 보면서 팝콘 먹기는 힘들다'는 실용적인 충고를 놓치게 만들었다.

김대중에 대한 기억은 선보다 점. 아예 모른다고 말하기엔 많았고, 한 사람의 궤적을 온전히 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개수였다. <길 위에 김대중>을 고른 건 <서울의 봄> 때와 비슷한 이유였다. 그 시대를 살아가지 않은 이의 호기심이자 갈망이었고, 본능적으로 꿈틀대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청년 시대의 무지는 시대 불문, 언제나 사회에 적신호를 켜지 않았던가. 거기에 일조할 수는 없다.
 
교과서 말고 길위에서 만난 김대중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명필름, 시네마6411

 
2030 세대에게 김대중이란 인물을 키워드로 요약한다면 아마 '한국인 역사상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자', '햇볕 정책' 정도일 것이다. 그가 민주화 투쟁의 전선에 있었다는 사실은 낯설다. 역사 교과서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가르치길 꺼린다. 역사적 사실은 명백하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오명은 유효하기 때문일까. 국정 교과서가 발행될 때마다 민주화 운동의 가치를 깎아내렸다는 논쟁은 제기되고 있고 민주화 운동을 설명하면서 '빨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길 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의 생애를 다뤘지만, 동시에 근현대사 압축 본이다. 1924년에 태어나 2009년에 서거한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을 관통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화 운동을 직접 살아낸 인물이기에 <길 위에 김대중>은 개인적 삶을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 그 이상의 것을 수행하게 된다. 특히 1987년 광주를 방문하는 김대중의 카퍼레이드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만큼 영화는 민주주의에 중점을 둔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 '빨갱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처음에는 홍조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줄 알고 "세상에 빨갱이가 너무 많다!"는 어른들의 말에 수긍했다. 시간이 흘러 정치적 프레임의 변천을 배우게 되었고 현대사의 복잡성을 이해했지만, 실제로 살아보지 않았기에 체감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의구심에 <길 위에 김대중>은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제 인물들의 증언과 기록 미디어를 통해 관객에게 역사를 추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김대중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네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세 번의 대선 낙선을 거쳤다. 납치, 살해 위협, 투옥, 사형 선고 등 요즘 정치권에선 볼 수 없는 일이 일상적으로 휘몰아치는 그의 삶은 개인적인 어려움과 동시에 요동치는 현대사를 보여준다.

그 시절에는 군인이 국민을 지키지 않았고 '빨갱이'란 이유로 시위자들을 곤봉으로 때렸다. 부정 투표와 헌법 개정은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실행되었고, 마치 신탁통치의 연장선처럼 미국 같은 거대한 국가에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호소해야 했다. 특히 언론만 막으면 국민에게 알 권리를 완벽하게 박탈할 수 있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이제는 SNS나 유튜브를 통해 일반인도 정치적 주장을 펼치고 사건을 보도하는 세상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알았던 김대중에게 5·18 민주화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하자 광주 시민들은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공수부대에 의해 유혈 진압을 당했다.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에 끌려갔던 김대중은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투옥 생활을 거쳐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나서야 다시 광주를 만났다. 눈물을 쏟는 김대중과 광주 시민들의 표정만으로 어려웠던 현대사의 비극이 설명되었다.
 
MZ답게 정치 영화 보기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명필름, 시네마6411

 
왜 하필 '길 위에' 김대중이었을까? 국회 속 김대중, 청와대 속 김대중이 아닌 길 위에 김대중을 통해 그의 정치적 행보를 기억하려 했을까. '속'과 '위에'라는 표현적 차이처럼 장소가 지닌 개방성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인물이 다르다. 정치인이 길에 나서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다. 바로, 대중이다.

수백 번에 걸친 대중 강연과 연설을 통해 자신의 포부를 말하는 김대중의 모습은 그를 향한 정치적 호오(好惡)와 무관하게 '진짜' 정치인의 자질을 되묻게 한다. 짜인 각본 없이 대중과 소통하며 말로써 대중을 설득하는 김대중의 행보. 요즘은 SNS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질의응답 없이 회견을 진행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방법의 차이라고 치부하기엔 자질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자질을 되물어야 하는 건 정치인만이 아니다. 길 위에 김대중과 함께했던 건 시민들이었다. 시대에 따라 양민, 국민, 시민 등 호칭은 변화하였지만, 대중은 모든 정치척 행보의 구심점이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정치 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말처럼 '진짜' 시민의 자세를 재고해야 '진짜' 정치인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 특히 청년 세대는 어떤 대중인가. 역대 총선과 대선에서 낮은 투표율을 보인 '정치 무관심층', 혹은 '남의 눈치 안 보는 세대, '모 아니면 도인 세대론'도 거부하고 싶다. <길 위에 김대중>을 보다가 팝콘 통을 내려놓은 나처럼 청년 세대는 경험하지 않은 과거를 배우고, 나아가려 애쓰고 있다. 비록 그 방식은 미숙할지 몰라도 새로운 정치의 중추를 향하고 있다.

마치 <서울의 봄>을 보면서 얼마나 열 받았는지 심박수를 확인하는 챌린지가 유행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답게 역사를 배우고 분노하고 있다. 그래도 '<서울의 봄> 보느라 빡쳐서(화나서) 팝콘 못 먹었음'이란 MZ식 관람평은 <길위에 김대중>에도 유효하니 팝콘은 사지 않길.
길위에김대중 서울의봄 정치 대중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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