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6년, 2집으로 함께 활동했던 밴드 들국화. 왼쪽부터 손진태, 고 주찬권, 전인권, 최성원, 최구희, 고 허성욱.

지난 1986년, 2집으로 함께 활동했던 밴드 들국화. 왼쪽부터 손진태, 고 주찬권, 전인권, 최성원, 최구희, 고 허성욱. ⓒ 들국화컴퍼니

 
전 들국화의 베이시스트였던 최성원 형을 보면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이 디졸브 되면서 무한한 천재성을 느낀다.

그는 베이스뿐만 아니라 어쿠스틱 기타를 금방 물로 씻어낸 양상추처럼 상큼한 느낌으로 참 잘 치는 사람이다. 또 대한민국 가곡의 대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목련화', '그리운 금강산' 등을 작곡한 최영섭 선생님의 장남이기도 하다.
 
'그것만이 내세상', '매일 그대와', '제주도의 푸른 밤', '제발', '이별이란 없는거야' 등의 명곡들을 작사, 작곡한 그를 생각하면 천재적인 그의 음악적 재능에 나도 유능한 작곡가라고 믿었지만 한없이 평범하게만 느껴지는 좌절감과 열등감으로 한동안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우리 집 카세트에 녹음하면 꼭 히트합디다"
 1986년께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밴드 들국화

1986년께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밴드 들국화 ⓒ 들국화컴퍼니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그도 무명, 나도 무명인 시절 개포동의 18평짜리 좁은 그의 아파트에 밤늦게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처럼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맞아주면서 내가 방에 앉자마자 카세트를 틀어주며 노래를 하나 들려줬다.
 
"인원씨, 수철이가 히트하기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들어봐 달라고 노래하는 거 녹음한 건데 인원씨도 오늘 노래 하나 녹음 해봐요. 우리 집 카세트에 녹음하면 꼭 히트합디다"라며 기타로만 녹음된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 송이'를 들려주었다.

그 새벽에 그의 18평 아파트 문간방 작은 카세트 앞에 앉아 낡은 통기타로 자고 있던 그의 아들이 깰까봐 허밍같은 작은 목소리로 '제가 먼저 사랑할래요'를 녹음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그 노래는 히트했다.
 
성원 형은 늘 후배나 동료, 선배 음악인들의 자그마한 좋은 점도 높이 평가해주며 격려하는 따뜻한 면이 있다. 욕심이 별로 없는 듯한 그에게는 주변의 세상사 모든 단면들이 긍정으로 옷 입혀지며 재미와 행복으로 변한다.

그런 그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인지 그의 가사와 멜로디는 참으로 편안하면서 깊다.
 
1970년대 후반, 그가 용산의 국방부에서 현역 군인생활을 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된 그와의 만남에서 우리의 호칭은 인원씨, 성원씨였다.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당시엔 서로의 나이를 몰라도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금방 가까워지며 동년배로 인정하고 친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는 만날 때마다 늘 웃는 얼굴로 "인원씨 목소리 너무 좋아요, 오다 카즈마사 알아요? OFF COURSE 리드싱어, 똑같아, 우리나라에 인원씨같은 목소리가 없어, 내가 곡 좀 쓸게 부를래요?"라고 얘기하며 나를 추켜세우곤 했다. 그리고 한 달쯤 후 그가 제대 말년 외출을 나와 내가 근무하고 있던 충무로의 CM제작 사무실로 놀러 왔다.
 
"인원씨 주려고 만들었는데 한번 들어봐요" 하면서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된 노래 '매일 그대와'는 그가 기획한 <우리노래 전시회>란 옴니버스 앨범에 수록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선물로 부르게 된 노래로 내 이름은 가수 강인원이 됐다.

욕심 없고 따뜻했던 성원 형
 
 30일 오후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MBC 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김재철 헌정콘서트-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에서 그룹 '들국화'의 보컬 전인권과 베이스 최성원이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를 부르며 멋진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12년 6월 30일 오후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MBC 노동조합 주최로 열린 '김재철 헌정콘서트-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에서 그룹 '들국화'의 보컬 전인권과 베이스 최성원이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를 부르며 멋진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유성호

 
보통 당구장에서 당구를 칠 때 옷소매에 무엇이 묻지 않게 반소매 덮개를 팔에 낀다. 또 손가락에도 쵸크가 묻지 않게 한쪽 손에 손가락 장갑을 끼고 당구를 치게 된다. 그런데 당구가 끝나고 그는 반소매 덮개와 장갑을 그대로 낀 채 당구장을 나와 녹음실로 왔고 한참 후에 녹음실 히터가 너무 세서 겉 외투를 벗고 나서야 "어? 이게 뭐지?" 하며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함께 있던 엔지니어, 연주자들이 한바탕 웃게 되는 즐거움을 가진 적이 있었다.

확실히 그는 음악에만 극도로 민감해지고 그 외 것은 상당히 무딘 체질이었던 것 같다. 음악 외의 크고 작은 세상만사는 그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집중시키지 못하는 것 같은 본능적인 그의 음악감성이 부러웠다.
 
또 어느날은 반대로 음악은 젖혀두고 일상의 온갖 일들에 흥미를 집중하기도 한다. 컴퓨터, 영화, 기계, 외국여행, 등산, 사진 등등. 그러나 이내 재미를 잃어버리고 다시 음악에 몰입되어 한동안 안 보이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하면 여전히 싱글대는 목소리로 "어~ 인원씨 잘 돼요? 에이 이거 빨리 끝내야지, 신경쓰여서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하며 남의 얘기하듯 자신의 신곡 작업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그는 확실히 산만한 재미있는 천재다.
 
어느날 선배의 생일에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가 안 보이는가 싶더니 조금 늦게 창밖에서 털털거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마트에서 동네 배달이나 할 법한 50cc 오토바이에 헬멧까지 쓴 그가 멋있게 내리면서 "하이~!" 한다.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멋있게 들어오면서 "와~ 이거 속도감 죽이는데? 인원씨 한번 타볼래요?" 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그에게 "에이~ 너무 작아요, 좀 큰 걸로 바꿔요" 하면 그는 정색하며 "큰 거? 뭐하러? 이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얼마나 편한데, 하나도 안 막혀, 이건 하늘을 나는 양탄자야, 그럴 돈 있으면 유럽 여행이나 한 번 갔다 오겠네" 하며 싱글거린다. 그런 그를 보며 저 사람은 확실히 산만한 천재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에 그는 들국화의 베이시스트로 '그것만이 내 세상'을 작곡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1980년~1990년대를 살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었다. 동시에 꿈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담은 자기실현의 메시지로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큰 음악인이 되었다.
그것만이내세상 제주도의푸른밤 들국화 매일그대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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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공연연출가, 기획자로 활동해온 대중 예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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