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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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울아시아게임부터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까지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뛴 선수 뒤엔 항상 김미현(44) 물리치료사가 있었다. 김씨가 처음 국가대표 물리치료사의 길에 들어선 건 1986년, 어느덧 21년이다. 김씨는 1년에 큰 대회 하나씩 치르다 보니 어느새 21년이 돼 있다고 말한다. "원래 병원에서 트레이닝 받던 중 우연히 공채 시험을 봤어요. 남녀 각각 한 명씩 뽑았는데, 운 좋게 붙은 거죠. 1년에 한 번씩 중요한 대회가 있다 보니, 그거 준비하고 치르고 나면 어느새 1년이 지나버리네요." 고려보건대학 82학번인 김씨는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며 의료스포츠가 막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 이 길에 들어섰다. "처음 들어왔을 때 제 선배님들이 네 분 계셨어요. 그러다 모두 6명이 3년 사이에 치러진 그 큰 경기들을 치러냈죠. 제가 신입인데다 인력도 얼마 없던 때여서 정말 정신없었죠. 그래도 힘들었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스포츠를 좋아해서 보는 것도 좋았고, 일단 재밌었거든요." 올림픽엔 400여명, 아시안게임엔 600~800명가량의 선수들이 출전한다. 큰 부상 이후의 물리치료부터 자잘한 허리통증까지 모두 김씨를 비롯한 물리치료사의 몫이다. 이 모든 치료를 맡기엔, 10명의 물리치료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이 스포츠로는 강대국이거든요. 의료 부분도, 아직 그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는 상태예요. 선수촌장님도 선수 출신이라 옛 경험을 살려 의료팀을 지원해주시기도 하고요." @BRI@김씨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매일 12시간 근무한다. 토요일에도 선수들이 나와 운동하기 때문에 오후 1시까지 이들과 함께한다. 일요일을 제외한 공휴일에도 선수들을 혼자 나둘 수는 없다. "선수들이 몇 년 동안 열심히 훈련하는데 저도 당연히 나와야죠. 물론 힘들고 쉬고 싶을 때가 왜 없겠어요.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 딸아이에게도 항상 미안하고요. 하지만 물리치료에선 무엇보다 빨리 대처하는 게 중요하고 절 찾는 선수들도 있으니, 저만 쉴 수는 없죠. 이해해주는 남편과 어른스러운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김씨의 초봉은 24만원이었다. 21년이 지난 지금도,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대학동기들의 연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고 한다. "솔직히 스카우트 제의가 안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여러 군데에서 제의해왔지만, 자존심 때문에 옮기지는 않았어요. 최고의 선수들을 치료한다는 자존심을 단지 돈 때문에 버리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해야 부상도 낫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씨를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은 여러 선수들과 부대끼며 맺은 인연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후 메달을 딴 선수들이 찾아왔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같이 고생했던 이야기도 하면서 저도 축하해줬어요. 선수들이 제게 꽃과 메달을 걸어주며 감사하다고 안아줄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군요. 돈보다 훨씬 소중하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을 얻는 것이 바로 이런 행복 아닐까요?"
 양궁의 윤미진(왼쪽)·박성현 선수와 함께.
ⓒ 김미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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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치료법이 정답이라고 알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치료법에 대한 부작용을 알게 되고 또 다른 치료법을 발견하게 되는 게 물리치료의 세계라고 김씨는 전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책을 보고 새로운 정보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치료사는 안주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고 한다. 힘들수록 더 뛰면서 땀 흘리는 선수처럼, 일심동체로 그 선수의 건강과 응급치료법을 찾기 위해 책 한 장 더 읽고 더 선진적인 치료 사례를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잖아요? 흐르는 물 같은 치료사가 되고 싶어요." 김씨는 최고의 선수를 지원해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기술적인 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선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관심과 애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물리치료실에 찾아오는 선수들을 보면, 겉으로는 몸을 다쳤지만 그보다는 마음을 더 많이 다친 선수들이에요. 경기를 몇 달 앞두고 다치는 선수들도 종종 있어요. 몇 년 동안 준비한 대회인데 부상으로 뛸 수 없거나 본래 컨디션을 찾을 수 없다면, 그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어요? 제 몸이 아니니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같이 아파해주고 부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내 몸처럼 함께 움직이는 정성이 매우 중요해요." 물리치료실에서 속을 터놓고 나누는 이야기는 항상 일방적으로 지시받는 선수들에게 아주 중요한 '마음의 휴식처' 기능을 한다고 한다. 김씨는 이러한 휴식을 통해 선수들이 다시 일어나 뛸 때, 자신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행복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김씨에게 항상 행복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제가 만든 프로그램대로 선수가 맞춰 재활운동을 하는데 잘 회복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마음이 급한 선수도 힘들고, 저는 그 선수의 불안감과 부담감까지 지고 더 무겁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해요. 제가 미안하고 더 절망하는 순간을 맞는 셈이죠. 그런데 선수가 저를 신뢰하고 서로 하나가 돼 노력하는 순간에 이게 극복되더군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줄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더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삶의 지혜 같아요."
 역도의 장미란(오른쪽) 선수와 함께.
ⓒ 김미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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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그리는' 선수들의 동반자 그런 의미에서 선수와 물리치료사는 아름다운 동반자다. 상대방에게 전해준 말 한마디가 각자에게 큰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그 과정에서 선수가 용기를 얻고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가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고 이를 실현할 때가 김씨에겐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과 행복을 맞는 순간이다. "몇 년 전 스페인에서 열린 대회에 나가는 대학생선수가 첫 출전이어서인지 지나치게 긴장하는 거예요. 옆에 있던 그림 속의 강아지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았죠. 그래서 '몇 년 동안 마치 저 강아지처럼 눈 부릅뜨고 훈련하지 않았느냐, 이 악물고 해보자'고 했어요. 그저 기운을 북돋워준 건데 그 선수가 제 손을 굳게 잡으면서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금메달을 따왔어요. 그 메달을 제 목에 걸어주는 순간 '우리는 하나'란 사실을 실감했죠. 그 선수는 제 말을 새기면서 경기에 임했다더군요. 감동의 순간이었죠. 물론 선수 자신들의 고된 훈련이 좋은 성과를 이룬 것이지만, 서로 믿고 의지하는 정신력에서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역사가로 살고 싶었다는 김씨. 지금은 화가도, 역사가도 아닌 물리치료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물리치료사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의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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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선수들의 종목과 경기 상황에 맞게 프로그램을 '그려내고' 경기 때마다 세계를 돌며 물리치료를 연구하는 김씨는, 어쩌면 어릴 때 꿈꾸던 길을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1년 전 전문대를 졸업한 후,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미래에 친구들에 비해 풍요롭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는 김씨. 그렇지만 이젠 그런 과거를 꾸짖고 180도 변한 인생에 스스로 박수를 보내며 웃는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선 4년제 나온 동창생들과 격차가 크겠지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저처럼 풍요로운 삶이 있을까 싶어요. 그리고 최고의 선수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 싶어요. 일하는 행복, 해외에서 경쟁하는 선수를 통해 애국하는 삶. 제 인생이야말로 태릉선수촌의 주연은 아니지만 영원히 빛날 아름다운 조연 아닐까요?" 김씨의 아름다운 미소가 유난히 빛났다.

국가대표 태릉선수촌 물리치료사 김미현 아테네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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