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푹푹 찌기 시작한다. 나는 가족들과 아침 일찍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며 오늘 이 무더위를 어떻게 피해 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냉방이 잘된 영화관에서 잠시나마 시원한 휴가를 보낼 요량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관에 들어서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영화관 엘리베이터 입구에는 여러 편의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아이들과 아내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내는 며칠 전 신문 기사에서 <화려한 휴가>에 대한 평이 좋더라며 그것을 보자고 했다. 나도 신문을 통해 줄거리를 대충 알고 있었지만 내용이 너무 무거워 더운 날씨에 너무 덥지나 않을까 생각해서 고개를 가로젓다가 고2, 중2인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던져줄 것 같아 망설이다 동의했다.

▲ 불의에 맞서 기꺼이 한 목숨 바친 그네들 속에서 함께 기뻐할 수 없는 신애의 표정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바로 그것이었다.
ⓒ cine21.com
초록으로 눈부신 날 갑자기 들이닥친 비극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눈부시던 오월 어느 날, 초록 물결로 넘실대는 들판 위로 굉음을 뿜으며 웬 전투기들이 날아든다. 들판에서 한가롭게 일을 하던 촌부들이 그 틈에 허리를 펴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길한 전운이 감도는 걸 느낀다.

이 영화는 당시 군부의 행보나 시민군 내부의 움직임 등 가급적 정치적인 상황은 배제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한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웃의 비극에 관심을 듬뿍 담아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민주화를 목청껏 외치던 정치인들도, 학생세력도 아닌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다. 그들이 왜 일어섰으며, 왜 총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인간적이면서도 격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평범한 택시기사 민우(김상경분)는 어린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공부밖에 모르는 고3인 동생 진우(이준기분)와 단둘이 살고 있다. 민우는 동생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분)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는 그녀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상이 지극히 소중하기만 하다.

5월18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학생들이 이의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공수부대원들이 학생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하고 급기야는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한편 민우의 동생 진우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친구를 보고 고등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하다 계엄군들이 발포한 총에 맞아 결국 숨지고 만다. 민우는 자신의 삶의 전부인 동생 진우의 죽음을 겪고 나자 적극적으로 시민군에 참여하게 되고 계엄군에 맞선다.

참 군인의 길을 가고자 했던 예비역 중령 박흥수(안성기분)는 권력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는 모습에 격분하여 시민군을 조직하고 지휘하면서 열흘간의 사투를 벌이다가 최후를 맞는다.

▲ 이 영화는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인간애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 화려한 휴가
밀려오는 진한 감동 VS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 영화를 보면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인간애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까닭모를 슬픔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 이유를 대신 설명해 주고 있다.

폭도의 오명을 죽음으로 항거하다 죽어간 다양한 계층의 평범한 시민들이 천상에서 다시 만난다. 천상의 결혼식에서 환하게 웃는 하객들 중에 오직 한사람 오월의 신부인 '신애'의 얼굴엔 왠지 슬픔이 드리워져 있다. 불의에 맞서 기꺼이 한 목숨 바친 그네들 속에서 함께 기뻐할 수 없는 신애의 표정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바로 그것이었다.

광주시민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이웃을 무참히 총칼로 짓밟은 저들에 맞서 싸우다 죽어가는 이름 없는 시민군을...

급박하고 애절한 신애의 목소리가 1980년 5월 27일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난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야? 미몽을 헤매고 있었지!

영화는 막을 내렸지만 신애의 절절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천상의 결혼식장에서 신애의 그늘진 표정이 가슴에 꽂힌다.

오늘만이라도 신애가 내게 전한 이 뭉클한 슬픔을 온전히 견디어 내리라.
2007-07-29 19:56 ⓒ 2007 OhmyNews
화려한 휴가 영화 5.18 김상경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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