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청첩장과 부고장 아닐까.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사푼대는 나비같이 화사하고 하이얀 고깔과 같은 환함이 가득 담긴 청첩장의 패션은 나날이 진화하는 반면, 부고는 한 장의 기별도 없이 그저 전화에서 전화로 그렇게 쓸쓸이 이어지는 것이다.

친정쪽으로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J. 지난주에도 아는분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온 길이었다. 다들 "좋은 날 가셨다" "호상"이라며 고인의 유족을 위로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봄날의 눈부신 햇살도, 흩날리는 벚꽃잎도 왠지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은 손으로 움켜쥐면 바스라질 것 같았고 꽃잎은 살짝 불기만해도 분산되어 버릴 듯 했다. 

매서운 겨울보다, 봄에 세상을 뜨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아마 그것때문일 것이라고 J는 생각했다.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다'는 것.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끝까지 희망하고 갈구했던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었다. 정말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세상을 보내야했던 사람아니었을까.

두 노인의 죽기 전 이야기들

 <버킷 리스트> 포스터

<버킷 리스트>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죽기 전에 꼭 하고싶은 것들'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영화 <버킷 리스트>는 모건프리먼과 잭니콜슨 이 두 노장이 함께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J의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목이 더욱 마음에 끌렸다.

요즘 '죽기전' 시리즈를 대변이나 하듯 서점에 가보면 ‘죽기전에 봐야할 영화’ ‘죽기전 가봐야할 여행지’ ‘죽기전 마셔야 할 와인’ 등을 너무 빈번하게 보아와서 다소 식상했는데 이제 영화마저 '죽기전' 시리즈인가, J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말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노인의 '죽기전'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교수의 꿈을 꾸었던 카터(모건 프리먼)는 병원의 침대에서 대학시절 교수가 내주었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본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병원침대에서 그는 쓸쓸히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패기만만했던 대학시절 그가 작성했던 목록은 대충 이와 같았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는 것','백만장자가 되는 것' 등. 그러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 '울음이 날때까지 웃어보기' 등.

우연히 같은 병실을 쓰게 된 괴팍한 백만장자 에드워드(잭 니콜슨)는 카터의 진실한 모습에 감화되어 그와 함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병실을 박차고 나온다. 이제부터 그들은 남은 생을 항암제투여와 실험, 수술, 입퇴원의 반복대신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해 기꺼이 이 한몸 던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문신하기’ ‘스포츠카 타기’ ‘스카이 다이빙’ 까지는 그런대로 유쾌했다. ‘에이~ 말기암 환자가 말도 안돼~’라고 하기에 영화는 아름답고 인생도 아름답다. 그런데 전세기를 타고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장면에 이르러서 J는 '이건 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중 에드워드가 백만장자라는 사실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좀 이건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들 덕분에 J도 덩달아 눈요기를 골고루 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이집트, 세링게티, 타지마할, 세계의 유명 명소를 두루 돌아다닌 뒤 집에 돌아온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입맞추기’ ‘오랜만에 남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와 같은 소박한 목록에 최종 종지부를 찍고 리스트를 마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의 생도. 물론 히말라야의 봉우리에 묻힘으로써 ‘장엄한 풍경 바라보기’라는 최후 리스트를 이루긴 했지만.

화려한 세계일주속 숨은 메시지 건지기

'돈 없는 사람은 남은 인생마저 사람답게 즐길 수 없냐'는 다소 열등감 섞인 기분이 들었다. 처음, 카터가 쓸쓸한 병실에서 남몰래 수줍은듯 버킷리스트를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장면을 볼때까지만 해도 J는 그것의 목록이 아마 매우 사소하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정말 놓치고 사는 것,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더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화려한 세계일주에 파묻히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한 장면

영화 <버킷리스트>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그럼에도 영화는 J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었다. 카터와 에드워드가 이집트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앉아 석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집트 사람들의 죽음관, 인생관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집트인은 죽음에 관해서도 꽤나 철학적이어서 죽었을 때 이 질문따라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천당, 지옥이 결정된다고 하지."
"겁나는데."
"당신의 인생이 누군가를 즐겁게 만들어주었는가."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내용은 정확하다. J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꼭 자신에게 묻는 것 같아서 뜨끔했다. 누군가를 즐겁게 만들었을까? 그런데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특별히 괴롭힌 사람도 없었지만 특별히 즐겁게 해준 사람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가능성은 있다, 고 J는 생각했다. 아니, 위로했다.

죽기전에 하고 싶은 일은 지금 하고 싶은 일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먹을수록 누군가를 즐겁게만드는 일이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이라는 게 참 묘해서, 나이를 먹을수록 누군가로부터 즐거움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즐겁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은 쉽사리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즐거워야한다. 정말 그래야한다.

 영화 <버킷 리스트>의 한 장면

영화 <버킷 리스트>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J는 종이를 꺼내고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납부해야할 공과금, 사두어야할 집기들, 장봐야할 품목들, 반납해야할 DVD나 책을 적은 리스트. 그런 것 말고 정말 자신이 지금하고 싶은 리스트를 써보았다. 그러나 정말 이게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쓰려고 하면 쓸수록 거창한 것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줘야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기대 때문이었다.

해외여행이니 로또니 이런 것 집어치우자. J는 리스트를 쓰기 시작했다. '집앞 철쭉이 얼마나 피었는지 볼 것', '이번 주말엔 아이들에게 꼭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만들어줄것','겨우내 쳐박혀있던 자전거를 깨끗이 닦아서 타볼 것','5년전 연락도 없이 헤어진 동창에게 불현듯 전화해볼 것','정말 예쁜 셀카사진 한장 찍기' 등 . 죽기전에 하고 싶은 일은 의외로 끝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니까.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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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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