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과 <다찌마와 리>의 배경

 영화 <놈놈놈>과 <다찌마와 리>의 포스터 다시 돌아온 2008년 만주 웨스턴

영화 <놈놈놈>과 <다찌마와 리>의 포스터 다시 돌아온 2008년 만주 웨스턴 ⓒ 이희동


7월 중순 개봉 이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인기는 역시나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비록 기존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지는 못했지만 영화는 2008년도 최고 관객 수를 기록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전삐놈'(전진+빠삐코+놈놈놈) 등과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과연 영화의 인기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것은 듣는 사람에 따라 우문일 수도 있겠다. 2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각종 기록들을 갈아치우겠다며 작정하고 만든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 영화에 한 명만 출연해도 그 무게가 충분한 정우성, 이병헌, 송강호가 한꺼번에 나오고, 그 어느 한국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장대한 액션신이 펼쳐지는 영화 <놈놈놈>.

그러나 영화 <놈놈놈>을 보면서 정작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영화의 배경이었다. 1930년대 만주라는 영화의 배경이 낯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시기, 잊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

이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 <다찌마와 리>도 마찬가지다. <다찌마와 리>는 <놈놈놈>과 달리 B급 영화를 표방하며 오히려 1960~70년대 영화들을 패러디하고 있지만, 그 배경은 분명 같은 일제 강점기 만주이다.

최근에 개봉한 두 영화가 모두 같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것을 사회적인 어떤 흐름과 연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1960~70년대의 만주 웨스턴

1960~70년대의 만주 웨스턴 어두웠던 그 시대 사람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었던 장르

▲ 1960~70년대의 만주 웨스턴 어두웠던 그 시대 사람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었던 장르 ⓒ 한국영상자료원

일제강점기 때의 만주가 영화 배경으로 등장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0~70년대 우리에게는 '만주 웨스턴'이란 장르가 있었다. 영화 <놈놈놈>의 주요 텍스트가 되었던 이만희 감독의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를 필두로 영화 <황야의 외팔이>, <당나귀 무법자>, <두만강아 잘 있거라>, <광야의 결사대> 등이 이미 그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된 바 있다.

당시 '만주 웨스턴'이 한국사회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서구의 서부영화 붐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할리우드 서부영화와 소위 마카로니(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불렸던 이탈리아 웨스턴이 풍미하던 그 시대, 당연히 국내 감독들은 그것들을 모방하고 우리의 정서에 맞게 변용시키길 원했을 것이며 그 결과가 소위 '만주 웨스턴'이란 장르 아닌 장르로 굳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만주였을까? 이에 관하여 영화 <놈놈놈>의 감독 김지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 한국영화에도 웨스턴이 있었어요. 1970년대 만주벌판을 무대로 만든 '만주 웨스턴'이 있죠. 반세기 만에 다시 끌어온 우리 한국영화의 건강한 장르죠. 멋진 상업 오락영화로 부활시키고 싶었어요. 미국 정통 웨스턴에서 서부가 미국적 이상과 가치관을 반영한 신대륙이자 개척의 공간이었다면 우리 만주 웨스턴에서는 만주가 바로 1930~40년대 당시 기회의 공간이자 개척의 공간이며 꿈의 공간이지 않았을까요? 말을 타고 광활한 대평원을 질주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환상이기도 하지만 위가 막히고 아래로 닫힌 우리 한국 사람들의 민족적인 판타지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사적 격변기를 살았던 멋진 남자들의 무용담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요."(TOP Class 9월호 김지운 감독 인터뷰)

결국 1960~70년대 당시 1930~40년대의 만주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당시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한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당시 군부 독재 하에서 답답한 일상을 이어간 대중들은 그들의 꿈을 펼칠 시공간이 필요했는데, 만주벌판은 있었음직한 판타지를 줄 수 있었던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국가의 눈치를 보면서 민감한 분단체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 민족의 영원한 원수 일제만을 욕하면 그뿐인 1930~40년대 만주. 요컨대 삼엄한 분단체제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만주는 우리가 한반도 이북을 건너 대륙과의 연결을 꿈꿀 수 있도록 허락된 안전한 시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 '만주 웨스턴'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대륙의 꿈을 꾸며 등장한 웨스턴이지만 1930년대 만주가 배경인 이상, 항일 이데올로기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친일파가 판을 치는 사회이지만 교과서나 대중문화를 통해서는 끊임없이 반일감정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풍토 아니었던가. 요즘은 그 허울뿐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후안무치의 시대이지만.

1930~40년대 만주라는 시공간에서 마냥 욕망만 좇으면 역사에 대한 배신일 것 같은 강박관념. 공적인 역사만이 중요하다고 강요받던 1960~70년대, 결국 '만주 웨스턴'은 그 '몹쓸' 도덕주의를 과감히 버리지 못한 채 그 한계 속에 갇히고 만다.

2008년 만주 웨스턴

광활한 만주 벌판  영원한 민족적 판타지의 공간

▲ 광활한 만주 벌판 영원한 민족적 판타지의 공간 ⓒ 바른손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사라져 버린 우리의 '만주 웨스턴'. 2008년은 그 사라졌던 '만주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화려하게 복귀한 원년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놈놈놈>을 비롯하여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가 '만주 웨스턴'을 직접 운운하며 시장에 등장한 것이다. 해외에서부터 '김치 웨스턴'이라고 불렸다는 08년 '만주 웨스턴'은 기존 웨스턴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것의 복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08년 '만주 웨스턴'은 기존 웨스턴의 가장 큰 한계였던 도덕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60~70년대의 '만주 웨스턴'이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한, 미국의 건국신화와 같은 정통 서부 영화와 비슷하다면 08년 새로운 웨스턴을 주장하며 등장한 <놈놈놈>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온갖 욕망의 질주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 스파게티 웨스턴과 비슷하다.

영화 <놈놈놈>의 주인공들은 각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캐릭터를 부여받았지만, 그들의 행위는 결코 그 이름만큼 확연하게 다르지 않다. 그들 모두 각자의 욕망을 위해 열심히 뛰고 움직일 따름이며, 그런 그들을 굳이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맥락일 뿐이다. 기존의 '만주 웨스턴'에서 절대 악역을 맡았던 일제마저도 영화 <놈놈놈>에서는 그들의 욕망을 위해 무한 질주하는 하나의 조연에 불과한 것이다.

분명한 선과 악을 패러디 한 영화 <다찌마와 리> 영화는 기존 만주 웨스턴의 도덕주의를 비꼰다

▲ 분명한 선과 악을 패러디 한 영화 <다찌마와 리> 영화는 기존 만주 웨스턴의 도덕주의를 비꼰다 ⓒ 외유내강


이는 영화 <다찌마와 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1960~70년대 영화들을 패러디 하며 우리 편과 나쁜 편을 분명히 구분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과장되게 묘사함으로서 기존 '만주 웨스턴'이 가지고 있던 도덕주의와 근엄주의를 비꼰다. 그것은 차들이 지나다니는 한강대교 밑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부르짖는 것 마냥 표리부동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주는 왜 2008년 다시 이 사회의 화두가 된 것일까? 60~70년대나 지금이나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공간으로서 만주가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역사적 상징은 변하지 않았을 터, 과연 이 시대 무엇이 만주를 다시 불러낸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우경화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60~70년대의 만주가 대중들에게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판타지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를 가졌다면, 08년 현재 만주는 단순히 민족적 판타지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진출할 수 있는 기회와 개척의 땅으로서 현실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우석훈 박사가 그의 저서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현재 우리 사회는 제국주의의 전환점에 서 있는데, 만주는 북한 다음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진출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지역이다. 그곳은 과거 우리민족의 영토였다고 믿어지며 지금까지도 많은 조선족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북한은 만주벌판을 그들 정권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성지로 설정하고 있지만 남한 자본주의에게 만주벌판은 기회의 땅이자 개척의 땅이다. 아마도 우리의 자본들은 <놈놈놈>에서 정우성이 말을 타고 광활한 만주를 질주하듯 그곳에 그들의 경제적 영토를 새기고 싶을 것이다.

요컨대 08년 '만주 웨스턴'의 부활은 최근의 '고구려 열풍'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만주는 내부 모순이 이미 한계점을 넘어버린 한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판타지가 실현되는 공간으로서 현재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는 곳이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공존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공존 1930~40년대 만주의 가능성

▲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공존 1930~40년대 만주의 가능성 ⓒ 바른손


우리의 기억 속에 끝없이 펼쳐진 만주 벌판. 과연 만주는 남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투영되는 장소로서만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곳에서 미래를 위한 또 다른 가능성은 찾을 수 없을까? 우리는 20세기 초 만주의 역사에서 그 가능성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영화 <놈놈놈>이나 <다찌마와 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주는 20세기 초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뒤섞여 살던 공간이었다. 그곳은 동아시아의 근대국가체제가 자리 잡지 못한 그 당시 국가권력이 채 미치지 못하는 공간으로서 그만큼 글로벌한 지역이었다. 비록 강력한 제국주의를 건설한 일본이지만 그들이 경영하기에 만주는 너무 크고 다양했다. 그들이 결국 위성국가 만주국을 건설한 이유 역시 이에 연유한다.

따라서 우리가 20세기 초 만주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공존하는 방법이다. 글로벌화 한답시고 현 정부가 마냥 추진하는 영어몰입식교육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와 살을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들의 문화도 배워야 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질적인 존재를 품을 줄 모른다. 이미 많은 제3국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둥지를 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불순한 외국인이지 않는가. 오직 <미수다>의 미녀들처럼 예뻐야지만 대접받을 수 있는 우리 사회.

어쩌면 1930년대 만주로부터 교훈을 얻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급한 일인지도 모른다. 유엔으로부터 지적을 받을 만큼 강력한 단일민족주의 신화를 견지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좀 더 우경화 된다면 그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파시즘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놈놈놈 다찌마와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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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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