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바탕 복닥거리는 소리로 시끄럽다. 이른바 '빅3'라고 불렸던 미국의 대표 자동차업체 포드·제너럴 모터스(GM)·크라이슬러가 부도 위기에 몰려 죽겠다고 우는 소리다.

공룡 덩치를 자랑했던 이들이 사실은 허우대만 멀쩡했지 속은 골다공증에 걸려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포드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GM과 크라이슬러는 올해 파산할 수 있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러던 차에 지난 11일, 140억 달러의 지원 구제법안이 상원에서 부결되었다는 소식은 이들에게 마치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장 말싸움이 벌어졌고 누구 탓인지 따지기 시작했다. 경영진의 무능하고 방만한 경영도 주된 안줏감이었지만 전미자동차노조(UAW)를 '강성 노조'라 손가락질하며 탓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것은 한국의 텔레비전이며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빅3의 몰락이 노조의 과한 요구 탓이라며 한국 '귀족노조'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물론 한국의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얼마나 기형적인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는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여튼 덜컥 의심이 들었다. 정말로 빅3의 몰락은 노동조합이 기가 세서 일어난 일일까? 회사가 자금난을 들먹이면 노조는 잠자코 임금삭감을 받아들이고 회사부터 살려야 할까? 그러면 회사도 살고 노동자도 살고 시장도 살아서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까?

빅3의 몰락은 기센 노동조합 탓?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 포스터. 무어는 특유의 농담과 비아냥으로 GM의 '합리적' 경영이 얼마나 '비합리적' 실업과 경제 파탄을 만드는지 이야기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 포스터. 무어는 특유의 농담과 비아냥으로 GM의 '합리적' 경영이 얼마나 '비합리적' 실업과 경제 파탄을 만드는지 이야기한다. ⓒ 워너 브라더스

잠깐 눈을 돌려 보자. 미시간 주의 플린트시는 바로 GM이 태어난 곳이다. 마이클 무어란 이름의 소년도 여기서 태어났다. 33년간 일한 아버지는 물론 가족 모두가 GM의 노동자로 일했다. 그런 집이 많았다. 쑥쑥 고속 성장하는 GM은 플린트의 자랑이었다.

GM의 회장 로저 스미스가 플린트의 공장 11개를 폐쇄하고 3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모두들 경악했지만, 특히 무어는 로저가 왜 그랬는지 도무지 몰랐다. 해고는 회사가 어려울 때 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었다.

이미 GM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지만 더욱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했다. 플린트의 공장을 닫고 노동자를 해고한 돈으로 멕시코에다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다. 땅이든 사람이든 뭐든지 멕시코가 훨씬 싸다. 남은 돈으로는 전쟁무기 회사를 샀다. GM과 로저 스미스는 더욱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플린트는 어떡해야 할까? 무어는 로저 회장을 인터뷰하려고 뛰어다니는 한편 플린트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았다.

바로 <로저와 나>(1989). 당대 가장 논쟁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첫 작품이다.

레이건, 자본에게 자유를 주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고 상황은 다르다 해도 본질은 같다. 레이건 대통령 이후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자본이 마음대로 시장을 농락하도록 자유를 주었다. 빅3의 경영진은 그냥 놀지 않았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다. 언제나 자본은 최고의 이윤을 찾아다닌다. 미국은 스포츠실용차(SUV)가 대세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개발에 힘도 들고, 값도 반절인 소형차에 공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미국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기를 거듭하며 버텼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 FTA가 체결된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인간이 역사를 살피는 혜안을 갖기란 좀체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신자유주의 경제는 영원하며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했을 테다. 뜻대로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잘 나갔다면 참 좋았겠지만 요즘 무던히도 삐걱거린다. 월가의 금융위기는 실물경기 침체와 실업으로 이어졌고, 소비가 줄어들면서 자동차 수요도 줄었다. 신자유주의가 한계에 다다른 순간, 시장이 도미노처럼 붕괴되면서 빅3가 어퍼컷을 된통 맞은 것이다.

오바마도 빅3 경영진에게 돈을 그냥 주지는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돈을 받고 싶으면 해답을 말해보라는 거다.

그런데 이미 낡은 방법으로 쓴 맛을 보았음에도 기껏 떠올렸다는 해답이 심히 낡았다. 지난 2일 청문회에 나타난 릭 왜고너 GM회장은 해답으로 2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했다. 빅3가 내놓는 해답에는 한결같이 감원 계획이 들어 있다.

위기의 원인도, 책임도 노동자

 마이클 무어 감독(맨 오른쪽)은 <볼링 포 콜럼바인>(2002), <화씨 911>(2004), <식코>(2007) 등 미국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로 이름이 높다. 지난 미 대선 때 <슬래커 업라이징>(2007)으로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마이클 무어 감독(맨 오른쪽)은 <볼링 포 콜럼바인>(2002), <화씨 911>(2004), <식코>(2007) 등 미국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로 이름이 높다. 지난 미 대선 때 <슬래커 업라이징>(2007)으로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 워너 브라더스


역시나 노동자가 짐을 떠맡는 셈이다. 아마 대한민국이었다면 아마도 '귀족 노조'가 아니라 '왕족 노조'라는 말을 들었을 테다. 미국과 한국의 보수언론 그리고 공화당은 전미자동차노조 조합원들의 '엄청난 인건비'가 빅3를 부실하게 만들었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받는다는 시간당 70달러 남짓의 인건비는 퍽 괴상한 계산법으로 나왔다.

<한국경제신문> 12월 14일자 보도에 따르면 시간당 임금이 GM은 29.78달러다. 여기에 건강보험료·연금비용을 포함해 74달러 수준이다. 다른 보도에 따르면 퇴직 노동자 몫까지 뭉뚱그려 계산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래도 인건비는 자동차 단가의 10%에 못미친다. 나머지 90%는 어떻게 된 것일까.

물론 이런 싸움에서 경영진의 연봉은 덜 중한 문제로 취급된다. 포드의 멀랠리 회장 연봉은 2100만달러, 시급으로 따지자면 시간당 1만 달러다. 이쯤 되면 빅3 CEO들이 "정상화될 때까지 연봉 1달러만 받겠다"고 하는 모습도 그리 예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지나치게 노동자 임금이 많다고? 미국의 건강보험료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이 살인적인 건강보험료가 가족 단위로 하면 얼마가 될까? 실업자는 꿈도 못 꾼다. 미국에서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약 4700만명에 이른다. 거의 대한민국 인구에 가까운 수가 건강보험없이 살아가고 있다. 돈이 없으면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땅에서 실업이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무서운 일이다.

정부가 빅3에게 구제금융을 주려는 이유는 '실업'이란 재앙을 막아보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빅3 모두가 돈 받으면 노동자 감원을 하겠다고 입 모아 합창을 한다. 그야말로 실업으로 실업을 막는 격이다. 당장은 효과를 보겠지만 결국은 실업자가 늘고 소비가 줄어들어 또 경기가 침체되는 악순환의 굴로 들어갈 것이다. 미국이 20년 전의 플린트처럼 폐허의 거리로 변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플린트는 신자유주의의 질병을 앞서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국유화'가 마냥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구제금융은 누굴 '구제'하나

 GM 공장의 해외이전으로 플린트 시의 지역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한때 플린트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범죄가 가장 많은 위험한 도시가 되었다.

GM 공장의 해외이전으로 플린트 시의 지역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한때 플린트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범죄가 가장 많은 위험한 도시가 되었다. ⓒ 워너 브라더스


여기저기 문어발을 뻗은 GM 덕에 플린트의 지역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실업자가 넘쳐났고 그 가족들은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났다. 그래서 사이비 판매원이 되고, 토끼를 손수 도축해서 팔고, 매일 피를 뽑아 팔아서 생존했다. 차마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 시 예산 감축으로 쓰레기 수거를 못했기 때문에 사람보다 쥐가 더 많아졌다.

한때 플린트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가장 위험한 도시로 전락했다. 마이클 무어가 보여준 플린트의 풍경은 마치 좀비가 떼로 덮친 땅 같았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니까 가난한 거라"고? 그래, <로저와 나>를 보면 골프 치던 할머니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

하지만 말이다, 공장 대신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제조에 도전의식을 갖고 자아실현을 하기란 좀 벅찬 일이다. 노동자를 살리지 못하는 '구제금융'이라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구제'인가?

로저와 나 마이클 무어 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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