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토) 저녁 7시 인천 월드컵경기장에서 '조모컵 2009 한일 프로축구 올스타전'이 열렸다. 사진은 조모컵.

8일(토) 저녁 7시 인천 월드컵경기장에서 '조모컵 2009 한일 프로축구 올스타전'이 열렸다. 사진은 조모컵. ⓒ 조모컵 조직위원회

경기 시작 2시간 전 인천 종합터미널에서 인천 월드컵경기장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터미널에서 경기장까지는 기껏해야 5분, 차가 막힌다 해도 10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기본 요금 2,400원만 내면 되는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택시를 탔음에도 택시 기사 민주혁(57)씨는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어디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네 안녕하세요? 인천 월드컵경기장까지요"

 

"학생 혹시 야구보러 가는길이세요? 오늘 에스케이(SK)는 광주로 원정 갔는데 말이야…."

"아니요. 오늘 축구장에서 한일 올스타전 '조모컵' 경기가 있거든요. 요즘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보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스가 인기 더 많죠?"

 

"그럼, 인천은 SK 인기가 아주 좋아. 그나저나 요즘 (김)광현이가 손목을 다쳐서 외국인 투수 영입해야하는거 아닌지 몰라. 작년에는 조모컵에서 우리가 도쿄에서 3-1로 이겼지. TV 중계로 봤는데 최성국이 참 잘했다지? MVP도 받았으니까."

 

"아 맞아요. 축구 좋아하시나봐요? 조모컵도 일일이 챙겨보시고. 오늘 경기도 응원하실 거죠?"

"당연하지. DMB 중계로 볼테니까 걱정말고 축구 구경 재미있게해요."

 

5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인천 SK 와이번스와 K리그 축구를 사랑하는 민주혁씨의 열정이 느껴졌다. 거스름돈 1,600원을 한 손에 꼭 쥐어줬던 그의 손은 참 따뜻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경기장 앞에 만들어진 일일 수영장에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꼬마 숙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 같아선 입고 있던 검은색 피케 셔츠를 벗어던지고 그냥 수영장으로 냅다 뛰어들어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빨리 기자석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세월아 네월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놀이에 흠뻑 빠진 동생들이 계속 눈 앞에 아른거렸다.

 

'미디어 패스 카드'를 목에 메고 취재 기자들과 사진 기자들이 출입하는 '미디어 출입구'를 통해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기장에 입장했다.

먼저 사진 기자실로 갔다. 그곳에 계신 사진기자분들은 '제주도로 룰루랄라 여름 휴가를 떠날 때나 쓰는 트렁크 여행가방'에서  대포만한 렌즈를 자기 자식 다루듯이 꺼내고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멀리 일본에서 온 기자들도 꽤 많았다. 흰색 면바지에 스트라이프 남방을 입은 일본 기자들의 모습이 내가 월드컵 취재를 나와서 다른 나라 기자를 만난 마냥 무척 생소했다. 

 

그분들을 지나서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이른 저녁(?)을 먹을 시간. 주최측 직원은 오늘 특별히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으니 배부르게 드시고 열심히 취재를 하란다. 저녁 메뉴는 밥 한 공기와 불고기 한 접시, 우동 한 그릇 그리고 과일 한 컵이었다.

 

서울에서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경기장에 허겁지겁 도착해서 그런지 무지 배가 고팠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나이키가 로고가 쓰여진 네모난 도시락 상자에 든 밥을 5분 만에 헤치웠다.

 

곧바로 기자석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이럴수가. 내 뒷자리에 SBS 박문성 해설위원과 최기환 아나운서가 앉아 있지 않는가.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서 눈 인사를 드렸는데 취재 회의를 하느라 바쁜 눈치였다.


사인받고 기념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기자석으로 향했다. 마침 그라운드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U-13 올스타전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경기 결과는 일본의 2-3 승리.

역시 유소년 축구 시스템은 한국보다 일본이 한 수 위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간단한 숏 패스 슈팅, 돌파 후 크로스까지. 일본 유소년들이 보여주는 축구는 매우 빠르고 힘찼다.

 

 조모컵에서 한국 프로축구 K리그 올스타를 응원하는 꼬마 서포터스 모습.

조모컵에서 한국 프로축구 K리그 올스타를 응원하는 꼬마 서포터스 모습. ⓒ 조모컵 조직위원회

 

저녁 6시가 넘자 점점 관중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커플로 수원 삼성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열혈 축구팬부터 흰머리가 히끗히끗한 50대 아저씨까지. 그 연령대가 다양했다.

특히 남쪽 관중석(경기장 북쪽 골대 뒤편)에 앉은 수원 삼성 서포터스 '그랑블루'의 함성이 대단했다. 수원 삼성은 이운재, 곽희주, 리웨이펑, 에두 등 무려 4명의 올스타가 있는 팀.

 

그랑블루는 차범근 감독부터 이운재, 에두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며 힘을 보탰다. 중국 출신의 중앙 수비수 리웨이펑이 그라운드를 밟자 그들은 '리웨이펑 짜요!'를 목청껏 외쳤다.

 

저녁 7시, 드디어 전반전 경기가 시작 되었다. K리그 올스타는 전반 14분, 마르키뇨스(가시마)에 골을 먹혔다. 아뿔싸. 우리 안방에서, 그것도 선제골을 먹히다니. 가슴이 답답했다. 관중석에 앉은 팬들은 크게 실망한듯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한국 선수들은 선제골을 만회하기 위해 그라운드 이쪽 저쪽을 쉼없이 누볐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골이 터지지 않았다. 이동국의 헤딩 패스를 받은 데얀의 오버헤드킥 슈팅은 골키퍼 손에 걸렸고, 기성용의 슈팅도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 전반전에 끝났다. 그런데 순식간에 관중석 분위기는 후끈 달아 올랐다. '초절정 인기가수' 소녀시대가 하프타임 축하 공연을 위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시대가 그라운드로 드러오자 3만 9천여 관중들은 인천 월드컵경기장이 떠나갈듯한 함성을 보내줬다. 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도 보지 못한 뜨거운 함성이었다.

 

"그래요 난 널 사랑해 언제나 믿어

꿈도 열정도 다 주고 싶어

난 그대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행운의 여신

소원을 말해봐 I'm Genie for you boy"

 

'소원을 말해봐'를 부르는 소녀시대 태연 누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문득 태연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해봤다. "고3 장영우의 소원은 무엇일까?' 당연히 나의 소원은 최고의 축구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2년 전 이맘 때,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서울 월드컵경기장 기자석에 처음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 자격으로 일일 취재 기회를 얻었고, '2008 베이징올림픽' 3차예선 우즈베키스탄전을 김귀현 기자와 함께 했다.

 

우즈벡전 역전승보다 더 짜릿했던 '기자 체험'

 

가슴이 떨려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기억, 관중석 안내를 하는 스태프 누나를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아 김 기자에게 호되게 혼났던 추억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샤우팅 해설'(축구 해설할 때 결정적인 상황마다 비명을 지르다시피 한다 해서 붙은 말)로 유명한 KBS 한준희 위원과의 깜짝 만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2007년 8월 22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던 KBS 한준희 해설위원.

2007년 8월 22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던 KBS 한준희 해설위원. ⓒ 김귀현

 

그날 밤 쓴 내 일기장에는 '10년 뒤 고등학생 시민기자를 데리고 서울 월드컵경기장을 찾아 한 수 가르치는 꿈을 꿀 것 같다'라고 또박또박 적혀있다.

 

그날의 추억을 회상하자 소녀시대의 노래는 '소원을 말해봐'에서 'GEE(지)'로 바뀌었다. 관중들은 그녀들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담기 위해 끊임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시카 누나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심한 플래시였다.

 

10분 동안의 축하 공연이 끝나자 몇몇 관중들은 '앵콜'을 외쳤지만 소녀시대는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유유히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소녀시대의 모습을 빼놓지 않고 카메라에 담느라 팔이 저릴 정도였다.

 

후반전, J리그 올스타의 공격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농구에서 말하는 반코트 게임이 이런 것일까. 이운재 선수는 김영광 선수와 교체되었고, 수비 선수들은 술에 취한듯 비틀거렸다.

 

J리그 올스타 이정수의 오른발이 번쩍였다. 그는 문전에서 침착한 오른발 슈팅으로 김영광 선수의 옆구리를 뚫어 경기를 2-0으로 만들었다. 그의 친정팀인 수원 삼성의 '그랑블루'는 진심으로 이정수의 골을 축하했다. 이정수에게 골을 먹자 K리그 올스타는 주저 앉고 말았다.

 

유병수, 김영후 등 K리그에서 골 냄새 잘 맡기로 소문난 공격수를 계속해서 넣었지만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이후 K리그 올스타는 두 골을 더 먹혔고, 최성국이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해 0패를 면했다.

 

결국, J리그 올스타가 2009 조모컵을 들어 올렸다. J리그 올스타 선수들이 조모컵을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K리그 올스타 선수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안방에서 1-4로 졌는데 당연히 기분이 안 좋았겠지.

 

땀에 흠뻑 젖은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벌컥벌컥 스포츠 음료를 마시는 K리그 올스타 선수들이 불쌍해보였다. 불쌍하기보다는 경기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예상대로 관중들은 시상식도 보지 않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온 김정혁씨는 "오늘 모처럼 관중들도 많이 왔는데 큰 점수차로 져서 열이 받는다. K리그 최고 선수들이 고작 1골을 넣은게 뭐냐? 빨리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한국 프로축구 K리그 올스타를 이끈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 프로축구 K리그 올스타를 이끈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조모컵 조직위원회

 

관중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릴 때 나는 노트북을 갖고 기자회견장으로 뛰어갔다. 라이벌 일본에 큰 점수차로 진 차범근 감독은 기자회견에 들어설 때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노트북에 손을 얻고 얼른 자판 두들길 준비를 하는 기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그는 "많은 팬들이 성원해주셨는데 그 성원에 승리로 보답하지 못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다음에도 이런 책임과 기회가 준비하면 잘 준비해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노력하겠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선수들과 감독들에 비해 차분차분 천천히 말을 하는 차범근 감독이 정말 고마웠다. 나는 아직까지도 '초짜 기자'라 인터뷰 대상이 랩을 하듯이 빨리 말하면 노트북 자판을 두들길 때 손이 떨려서다.

 

차범근 감독의 인터뷰를 끝으로 조모컵 취재도 끝났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경기장을 빠져 나왔을 때 느낌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이 기뻤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배도 고팠다.

 

아무도 없는 관중석을 멍하게 바라 보고 있으니 새삼 2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갔던 기자석의 추억. 2년 만에 다시 그 초심으로 취재를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또 다짐한다. 10년 뒤 내 후배를 이끌고 인천 월드컵경기장에 올 것이라고.

2009.08.09 09:36 ⓒ 2009 OhmyNews
조모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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