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도 떨리시죠?" 김연아의 경기를 함께 관람하던 후배가 말한다. 그런데 젼혀 떨리지 않는다. 쇼트때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과는 '수준이 다른' 오늘 프리때도 그랬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이렇게 스포츠, 특히나 '국가의 타이틀'을 거는 올림픽을 '반애국적 정서'로 감상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후배는 그런 나를 지탄한다. 저 선수는 '한 우물'만을 보고 달려왔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지금은 분명 김연아에게 '영광'이라는 꽃의 정점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이렇게 '스포츠와 인간극장을 동시상영'하는 기존의 전개방식이 김연아에게도 굳이 필요할까? 미안하지만,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건 김연아 개인의 문제 아니겠는가. 나도 나름 한 우물 파고 있고 영광의 꽃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너'에게 의무적으로 이런 나를 존경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아?

 

인생극장이 굳이 필요없는 김연아 그 자체의 스포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김연아를 생각할 때, 이제 '모질었던 그녀의 인생사'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감동을 끌어올리기 위해' 굳이 2차적 변수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명쾌하게 김연아'만'을 관람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스포츠와 인간극장이 언제나 '동시상영'되는, 정확히 말해, 인간극장이 없는 스포츠는 사실상 '낙오자들의 발버둥' 정도로 치부하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김연아는 인생극장 없이도 충분히 감정이 이입될 수 있는 "김연아표 피겨"를 이미 피겨라는 스포츠 그 자체로 가지고 있다. 김연아가 한 우물을 보고 달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CF를 몇십개를 찍든, 1년 수입이 100억대이든, 그래서 그만한 사회적 환원을 하는지 등에 대한 '2차적 변수'가 "김연아표 피겨"를 평가하는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가 대마초 좀 피우면 어때. 어디가서 대한민국을 비하해도 상관없다. 생활이 문란해도 상관없다. 성격이 거시기해도 상관없다. 이혼을 하든 파혼을 하든 결혼을 몇번 하든, 남의 남자를 가로채든, 사기를 치든 세급을 체납하든 무슨 암투병을 하든, 아니면 파벌싸움에 휘말려있든 그게 "김연아의 피겨"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떨리지 않으니 스포츠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져

 

이렇게 인생극장이 사라지니, 김연아의 '혹시나의 실수'가 그렇게 걱정되지 않는다. 쉽게말해, 좀 실수를 한들 '김연아는 이미 김연아'인데, 올림픽 메달색깔에 굳이 연연해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건 올림픽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될 때야만 필요한 긴장 아니겠는가? 혹은 올림픽'만'이 결정적 순간일때?

 

지금까지는 인생극장이 있어야지만 스포츠가 '관람'될 줄 알았다. 가난한 집안, 병투병중인 부모님, 계속되는 부상 등의 악조건은 스포츠를 또 하나의 '드라마'로 둔갑시켰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 구성은 '열광'의 감정을 끄집어내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는 스포츠를 그 자체로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일등을 하면 '열광'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절대로 이 드라마는 방송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일등'을 전제하고 2차적인 변수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스포츠는 결국 '절대적 미학' 의 범주가 아니라, '상대적 등수'의 개념에서만 우리의 감정을 자극할 뿐이다. 일등을 해야지만, 집안 살림도 나아지고, 인생도 역전될 수 있는 잘못된 구조 안에서 스포츠와 인간극장의 만남은 그러한 '순위경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김연아는 나에게 '스포츠를 굳이 고상한 감정까지 곁들여' 감상할 필요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으로 가르쳐 준다. 상대적인 '순위'가 중요하지도 않음을, 김연아의 국적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도 않음을 강조한다.

 

그녀는 아주 이기적으로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이기적인 김연아의 스포츠가 이제는 명실상부한 '객관적인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예술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래서 김연아는 '스포츠 자체로' 관람객을 행복하게 하는 일종의 예술가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의무적이었던 스포츠에 대한 강요된 눈물

 

한국의 운동선수들은 구조적으로 모두가 '인간극장'을 찍고 있다. 사연없이는 '운동을 직업으로'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면 운동을 직업으로 가지게 되면 독특한 사연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이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운동이라는 것이 그만큼 리스크를 가진 분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운동을 선택하는 순간 인간극장 카메라가 플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그 앞에서 '함부로' 웃거나, 평가하거나 하면 안 된다. 그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금메달'을 따더라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 시나리오의 완성은 앞서도 말했지만,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지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누구나 자기 사연'에 머물고 만다. 이 김 한장 차이의 '인생드라마'가 한국사회 안에서 스포츠가 소통되는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김연아는 스포츠 그 자체로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굳이 "힘내라~ 힘내라~!" 응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명화들이 걸려있는 미술관에 가면서 "GO! GO!"를 굳이 외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예술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2.26 17:11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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