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 이맘때가 되면 '내가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닌데...'라며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깐느 영화제의 맛을 본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저도 그 중의 하나구요.

 

오늘(5월 12일) 깐느 영화제가 개막된다고 합니다. 영화제, TV 마켓, 개인여행 등을 통해 10여 차례 그곳을 다녀온 경험과 기억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칸, 꺈너, 깐느?

 

언제부턴가 한국 매체들은 프랑스 남동부 해안지역(Côte d'Azur)에 자리잡은 이 도시를 미국식으로 칸이라 표기합니다. 현지인들이 발음하는 걸 들으면 '꺈너' 비슷하게 들리는데, 예전부터 써왔던 '깐느'가 '칸' 보다는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저는 깐느라고 쓰겠습니다. (깐느를 칸으로 쓴다면 빠리도 '패리스'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평소에는 애완견을 끌고 산책하는 은퇴 노인들만 해변에 드문드문 보이는 한적한 휴양도시인 깐느는 영화제, TV 마켓, 광고제 등 세계적인 행사들이 줄줄이 열리는 컨퍼런스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깐느 영화제가 열리는 5월 중순에는 영화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그리고 소매치기들)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당연히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호텔방 잡기도 힘들 뿐더러 가격도 페스티벌 프라이스를 별도로 적용하기 때문에 평소의 몇 배 이상 비싸지기도 합니다.

 

자 그럼, 영화제가 열리는 깐느로 들어가볼까요?

 

 깐느 지도

깐느 지도 ⓒ 이송원

 깐느 비치는 해운대

 

위의 지도는 깐느의 해안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중앙 상단에 잘려있는 기찻길을 기준으로 그 윗부분은 완만한 경사를 가진 언덕이 이어지고 그곳에는 주택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차로 15분 정도 더 올라가면 소설(그리고 영화) <향수>의 주무대이자 프랑스 향수산업의 메카인 그라스가 나옵니다. 지도의 오른쪽 해안도로를 타고 죽 가면 니스와 모나코가 나오구요. 대개 영화제 기간에 모나코에서 F1 그랑프리가 열리기 때문에 이 지역은 그야말로 축제의 도시가 됩니다.

 

영화제 기간 동안은 대부분의 이벤트들이 지도에 나온 구역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안 가본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깐느 비치는 부산의 해운대 비치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왼쪽(해운대의 조선비치 호텔 위치) Palais(빨레)라고 표기된 곳이 깐느에서 열리는 모든 컨퍼런스의 본부입니다. 완전한 이름은 Palais de Festival인데, 우리말로 하면 '축제의 궁전'쯤 됩니다. 몇 년 전, 이 건물 뒤로 Riviera(리비에라)라는 이름의 새 건물이 들어서서 빨레와 연결되었습니다.

 

그 바로 뒤는 하얀색 요트들이 장관을 이루는 올드 포트(항구)입니다. 영화제 기간이면 톰 크루즈나 빌 게이츠 같은 유명인사들의 초호화 요트들이 깐느에 오는데, 덩치가 커서인지 항구에는 못 들어오고 앞바다에 정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빨레에서 출발해서 해안을 따라 이어진 대로가 크루아셋 거리(La Croisette)입니다. 사실 2차선 정도이니 대로라고 부르긴 힘들지만 차도보다 더 넓은 보도까지 합치면 대로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다른 행사들과 달리, 깐느 영화제는 빨레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크루아셋 거리를 따라 줄지어 선 호텔들과 맨션들에서도 펼쳐진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빨레 Palais de Festival

빨레 Palais de Festival ⓒ 이송원

깐느 영화제와 깐느 영화마켓

 

흔히 말하는 깐느 영화제는 굉장히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입니다.

 

올해 <하녀>와 <시>가 진출한 경쟁부문(장편 및 단편), 비경쟁부문,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진출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  영화학교 학생들의 영화가 경쟁하는 '시네 폰다시옹(CineFondtion) 부문 등이 깐느 영화제의 공식 섹션입니다. 유명한 레드 카펫 행진은 주로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 영화들의 공식상영 직전에 벌어집니다. 특이하게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은 푸른 색 카펫이 깔린 빨레의 다른 출입구에서 펼쳐집니다.

 

깐느 영화제와는 별개지만 같은 기간에 열리는 섹션이 두 개 있습니다. 바로 감독주간과 비평가주간입니다. 이 두 섹션은 각각 프랑스 감독협회와 비평가협회가 주관하는데, 작품 선정(확보)을 두고 은근히 깐느 영화제측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감독주간에 출품된 작품들은 매일 밤 크루아셋 거리의 '노가 힐튼' 호텔 지하에 있는 극장에서 상영되고, 비평가주간 작품은 마르트티네즈 호텔 근처 미란다 극장에서 상영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감독주간은 레즈비언 여성들이 장악한 섹션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논란이 되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여튼, 해외영화제에는 유난히 게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술적 감수성과 성적 취향의 관계, 한번쯤 탐구해볼 만한 주제입니다.

 

이 3개의 영화제를 통칭 깐느 영화제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큰 행사가 역시 영화제 기간에 벌어집니다. 바로 깐느 영화마켓(Marche du Film)입니다. 전 세계 영화업자들이 모여 완성영화와 프로젝트를 거래하는 시장입니다. 빨레와 리비에라에 부스를 설치하는 배급사들이 많지만, 규모가 있는 회사들(특히 헐리우드 배급사)은 크루아셋 거리에 있는 특급호텔들과 맨션들을 빌려서 세일즈 오피스를 엽니다. 빨레 부스 임대료보다 당연히 비쌉니다. 스위트룸 하나를 2주 동안 빌리는데 수천만 원을 내야 하니까요. 참고로, 이들 호텔 외벽에 배너 하나를 거는 데도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용가리>의 경우 칼튼 호텔 외벽 광고판 하나에 8만달러를 냈으니까요. 한마디로 깐느에선 모든 게 돈입니다.

 

빨레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호텔인 칼튼 호텔과 마르티네즈 호텔은 뛰다시피 걸어도 10분은 가야 합니다. 그러니 영화를 수입하려고 깐느에 가는 사람들은 30분 단위로 이어지는 미팅, 하루에도 몇 편씩 봐야하는 시사스케줄(상영관 역시 빨레뿐 아니라 크루아셋 거리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식사약속, 파티를 다니느라 그야말로 발바닥에 불이 납니다. 호시절에는 한국에서만 6백 명이 가서 돈 될 만한 영화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스트레스는 가중되는 거죠. TV 뉴스로 소개되는 것처럼 칵테일 잔을 들고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는 파티 장면도 사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곳에서도 영화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간에 불꽃 튀는 물밑작업이 벌어집니다. 그야말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상황인 거죠. 여기에다 영화제들과 영화저널리즘의 로비와 정치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비즈니스의 장입니다.

 

 빨레에서 내려다본 크루아셋 거리

빨레에서 내려다본 크루아셋 거리 ⓒ 이송원

 

파티, 파티, 파티

 

드디어 가장 궁금해 하실 파티에 대해 얘기할 순서가 되었군요. 깐느에서는 파티를 여는 주최측도 다양하고 장소나 형식도 다채롭습니다. 영화제 측에서도 개최하지만, 각 부문에 진출한 영화들의 배급사에서도 공식 상영 직후에 파티를 열고, 각국의 영화기구(한국의 영진위 같은)들도 돌아가며 파티를 개최합니다. 호텔의 방퀫룸에서 열리는 파티가 있는가 하면 빨레 뒤편에 정박 중인 요트에서 우아하게 펼쳐지는 파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파티보다 인기가 있는 건 백사장에서 펼쳐지는 비치 파티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몇몇 호텔들이 자기 호텔 앞 일정한 구역의 비치를 전세내고  있어서, 파티를 열려면 호텔측에 부킹을 해야 합니다. 비치파티는 밤늦게 열리는데 음식과 술, 음악과 댄스가 풍성해서 일반인들의 인기가 가장 높습니다. 시커먼 떡대들이 지키고 있는 파티장 입구에는 남는 초대장 하나를 얻어보려는 금발미녀들이 엄청난 추파를 던집니다. 자기를 데리고 가주면 뭐라도 다 줄 듯한 기세로 말이죠.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당연히 소매치기들도 극성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만 해도 지갑 두 개를 날렸으니까요.

 

제가 준비한 파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파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도가 워낙 낮아서 한국 파티에는 영양가 있는 손님들(빅 바이어, 3대 영화제 관계자 등)도 없었지만, 그나마 군소영화제 관계자들과 한국사람들 몇십 명이 옹기종기 모여드는 수준이었죠. 일단은 파티의 흥행이 관건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바로 불고기파티였습니다.

 

프랑스로 이민간 지 20년이 넘고 필리핀스토어라는 가게를 운영하시는 이 사장님(부인이 필리핀 분입니다), 니스에서 일식집 주방장으로 일하던 이 사장님의 동생분이 팔을 걷고 도와주셨습니다. 고기와 와인은 넉넉히 준비했지만 접시와 컵은 200명분만 준비했습니다. 이것도 당연히 남을 줄 알았죠. 그런데 해가 질 무렵 고기 냄새가 풍기자 삽시간에 빨레 안에 있던 '선수'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게 아닙니까? 5백여 명이 몰려들어 줄을 섰고, 일회용 접시를 재활용하더니 급기야 컵에 고기를 받아가는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거죠. 그 뒤에도 몇 해 동안, 깐느에서 저와 마주칠 때마다 그 파티를 즐겁게 회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불고기와 김치의 힘이었습니다.

 

 낮시간 한적한 쁘띠 마제스틱.
이곳이 밤만 되면 전 세계 영화인들의 메카가 된다.

낮시간 한적한 쁘띠 마제스틱. 이곳이 밤만 되면 전 세계 영화인들의 메카가 된다. ⓒ 이송원

영화제 기간 동안 깐느는 잠들지 않는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파티들을 돌던 사람들이 집결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쁘띠 마제스틱'이란 이름의 바입니다. 마제스틱 호텔 뒷골목에 있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밤만 되면 바가 있는 삼거리 끝까지 수백 명의 영화관계자들로 가득합니다. 가게 안뿐 아니라 이동식 생맥주 수례까지 동원되는 북새통입니다. 아무리 바쁜 관계자라도 새벽에 펼쳐지는 초대장 없는 파티에서는 느긋하게 맥주 한잔과 담소를 즐깁니다.

 

비록 초대장도 필요없고 '파티'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이곳이야말로 깐느 영화제에 어울리는 진정한 파티인 거죠.  격식과 체면은 던져버리고 길거리에서 플라스틱컵에 담긴 생맥주 한잔과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 이야기, 안부 이야기, 수많은 계획들... 그렇게 깐느의 밤은 새벽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포스팅되었습니다.

2010.05.12 19:47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포스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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