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손을 뻗어 봐도 닿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첫사랑의 완성이다.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애타게 만들고 잠못 이루게 한다. 첫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설렘과 안타까움에 애간장을 태웠던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은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떤 시절. 그 시절이 만약 꿈같은 스무 살이라면 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둘의 만남이 '첫사랑'이었다고 미처 알지 못했던 스무 살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배수지 분)은 끝내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고 첫눈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첫사랑'을 가리켜 이뤄지지 못했을 때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라 하지만 그때의 아픔을, 상처를 누가 위로해줄 수 있을까.

미완성으로 끝난 첫사랑의 결과는 오랜 시간 선물 상자에 봉인되거나 건축 모형으로 남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거나 영영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그들에게 첫사랑은 기억 속에 담고 싶은 아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채우는 과정'에 집중하는 <건축학개론>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과거의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배수지 분)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과거의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배수지 분) ⓒ 명필름


승민과 서연의 만남은 '건축학개론' 수업에 의해서 이뤄진다. 개론 수업이 늘 그렇듯 시작의 설렘과 함께 둘의 만남도 이뤄진다. 교수는 학생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주제로 과제를 준다. 승민과 서연은 같은 정릉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함께 과제를 해결함으로써 가까워지게 된다.

혼자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공간과 길들이 함께 함으로써 새롭고 가고 싶은 곳으로 변한다. <건축학개론> 이용주 감독은 영화에서 '채우는 과정'에 집중한다. 건축학과를 다니는 승민에게 '설계'란 집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승민에게 집을 짓는 행위는 단지 시멘트와 돌로 건물을 만드는 것을 초월해서 마음을 담아 온기를 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짝사랑의 열병으로 가득한 그때, 서로의 마음을 채우기란 쉽지 않다. 서연이 승민을 위해 줬던 <기억의 습작>(전람회) CD. 노래의 제목처럼 그들의 만남은 완성되지 않고 단지 습작에 그친다. 술에 취해 쉽게 쓰인 습작시처럼 첫사랑은 완성되지 않는다. 설렘으로 충만했지만, 텅 빈 곳이 너무 많기에 마음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회를 통한 '집짓기'는 미완성된 것을 완성으로, 텅 빈 마음을 채운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처음 서연(한가인 분)이 제주도의 옛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페허가 된 것처럼 곳곳이 부서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연의 방만이 유일하게 멀쩡하게 남아있다. 마치 서연과 승민의 첫사랑의 기억처럼 소중하게 보관된 그녀의 방은 그녀에게 온전히 집을 채워 나가야하겠다는 의지를 부여한다.

첫사랑은 영원히 추억할 수 있다

 불현듯 승민(엄태웅 분)을 찾아와 첫사랑을 확인하려 하는 서연(한가인 분)

불현듯 승민(엄태웅 분)을 찾아와 첫사랑을 확인하려 하는 서연(한가인 분) ⓒ 명필름


대학생일 때 둘만의 공간이었던 주인없는 한옥집을 둘의 추억으로 채워나갔던 것처럼 새로운 집을 통해서 서연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완성하려 한다. 그리고 정말 그녀는 건축가가 된 승민(엄태웅 분)을 찾아가 예전에 둘만의 여행에서 부탁했던 약속을 다시금 환기시키며 묻는다. 자신의 집을 지어줄 수 있냐고. 결혼을 목전에 앞둔 승민은 처음에는 정중히 거부하지만 집짓기를 승낙한 이후 오히려 적극적으로 일을 수행한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승민 또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났을 것이다. 소중한 기억의 환기를 통해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알게 됐을 때, 승민이 지은 서연의 집도 완성된다. 그녀가 스무 살 때 그토록 꿈꾸었던 2층 집은 비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집은 아니지만 그녀의 텅 빈 마음을 채우고도 남을 아늑한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들이 이루지 못했던 첫사랑의 습작은 완성품이 되고 '건축학개론'에서 진심이 담긴 '논문'으로 변화된다. 이 소중한 채움의 과정은 승민과 서연이 뒤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첫사랑'은 절대로 붙잡을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영원히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첫사랑의 아련함이 잔뜩 묻어 있는 멜로

 텅빈 공간을 추억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거의 서연(배수지 분)

텅빈 공간을 추억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거의 서연(배수지 분) ⓒ 명필름


첫사랑은 그런 것이다. 불현듯 찾아와서 아련하게 먼 기억을 추억하게 되는 것. 나에게, 당신에게 첫사랑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일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그 예전의 편지를 다시 받게 된다면 가슴이 얼마나 먹먹해질까.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의 출현에 어쩔 줄 모르는 이들에게 지침서가 될만한 작품이다. 영화 <불신지옥>(2009)으로 상투적인 공포영화에서 살짝 벗어나 개성을 발휘했던 이용주 감독은 좀 더 세련된 작품을 통해 자신이 처음부터 찍고 싶었던 이야기를 만들었다. 대중영화로서도 손색이 없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을 통해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멜로를 만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대학 캠퍼스를 거닐었던 이에게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의 아련함을 충분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이용주 건축학개론 이제훈 배수지 엄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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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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