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체면에도 불구하고 첫사랑 때문에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던 이훤(<해를 품은 달>, 김수현)이 장안의 모든 여심을 흔들었다면, 요즘 장안의 모든 남심은 긴 생머리 흩날리며 귀에 이어폰을 살포시 꽂아주던 서연(<건축학개론>, 배수지)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영화를 본 남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내 얘기라고 말하는 <건축학개론>.

사람들에겐 모두 한번은 다시 돌아가 보고픈 과거가 있다. 그 순간은 첫사랑을 만나던 그 때가 아닐까? 세상 많은 말들 중에 첫사랑이라는 세 글자만큼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TV든 영화든 요즘 가장 뜨거운 소재가 바로 이 '첫사랑'인 것 같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촉촉히 마음을 적시며, <해를 품은 달>에 이어 첫사랑의 감성에 불을 당기고 있는 <건축학개론>. 2009년 <불신지옥>을 연출하며 새로운 공포영화의 문을 연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이 지난 22일 개봉 후 5일 만에 80만 관객을 동원하며 봄철 극장가에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모두가 '내 얘기 같다'는 공감백배의 첫사랑 영화. 그런데 나는 왜 아련하기보다는 씁쓸하고 우울한 걸까? 패기 없고 옹졸하던 스무 살의 내 모습과 속물로 나이 들어가는 오늘의 내 모습이 마치 초상화처럼 다가오기 때문일까? 영화 속 그들의 모습과 현실 속 나의 모습이 너무 닮아서 오히려 더 씁쓸한 이 영화, <건축학개론>

강남 압서방에 무너진 강북 순진남?

과거 언젠가 서울에서는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아직도 단독주택에 사세요?"라는 말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유행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당근과 채찍을 손에 쥔 정부의 개발정책에 따라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 도로 포장 등 개발된 강남은 어느새 이남과 이북 이상의 괴리감으로 대한민국에 자리하게 되었다.

'강남특별시'라고까지 불리며, 사회 지도층의 50%이상이 살고 있지만 지난해 8월 24일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이미 보았듯이 사회정의나 보편적 복지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더 관심을 보여 눈총을 받는 곳. 강남은 그 이름만으로도 힘없는 서민들에게 위축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 되었다.

명문대 건축과에 막 입학한 순진무구한 서울 촌놈 승민(이제훈)에게 강남의 개포동은 심리적으로 아주 먼 곳이다.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들으며 좋아하게 된 서연과 버스를 타고 자신에게 가장 먼 곳 개포동을 찾아간다. 정릉 시장통에서 국밥집을 하는 엄마와 허름한 한옥집에 사는 승민에게 강남의 고층 아파트는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인 것이다.

승민은 서연을 좋아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승민은 서연이 키 크고, 잘 생긴, 강남 압서방(압구정동·서초동·방배동)파 선배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소심한 승민은 결국 좋아한다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신의 오해가 사실인지 오해인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서연을 마음에서 밀어내 버린다.

강북의 서민출신인 승민에게 압서방으로 규정된 강남의 부잣집 선배는 도전조차 해 볼 수 없는 극복불가능한 산인 것이다. 그런데 스무 살 젊음의 특권인 무모한 용기도, 패기도 없이, 강남이란 간판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밀려버린 이 우울한 청춘을 향해 모든 남정네들이 다 자기 이야기라고 한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게스가 아닌 짝퉁이라 창피하고, 시장에서 국밥 파는 엄마가 부끄러워 외면해 버리며, 좋아하는 여자가 술취해 다른 남자의 부축을 받고 있어도 한발 나서지도 못하는 이 소심하고 찌질한 청춘이 아련하다고? 글쎄…나는 우울하기만 하다.

제주처녀에서 개포동 사모님으로 돌아온 첫사랑 서연

밤샘 야근을 하고 땀에 절은 듯한 후줄근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눈을 비비던 찰나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로 나타난 서연(한가인)을 승민(엄태웅)은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다. 풋풋하고 청순했던 스무 살 서연 대신 명품 매장에서 금방 나온듯한 고급스런 분위기의 서른 다섯 살 서연이 서 있었던 것이다.

전공이 피아노이면서도 피아니스트가 아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던 서연은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지자 의사와 결혼한다. 그리고 이혼 후 받은 위자료를 가지고 제주도에 집을 짓기 위해 승민을 찾아 온 것이다. '어디 살아?' 하고 묻는 승민에게 서연은 '개포동'이라고 대답한다. 스무 살적 승민에게 가장 멀게 느껴졌던 곳 개포동에 이제 서연이 사는 것이다.

"나 너무 속물스럽지. 그렇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버티면 버틸수록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대. 이만큼 버틴 대가로 제주도에 집도 짓잖아."

스무 살 승민의 마음을 온통 가져갔던 당차고 똑똑했던 서연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제주도 학원출신'이라 부르던 서울내기들의 왕따 쯤은 쉬이 무시해 버리던 제주처녀 서연. 소심하고 찌질했던 스무 살 승민의 모습만큼 15년의 세월과 함께 개포동 사모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서연의 모습은 우울하기만 하다.

그러고도 남는 우울함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제주도의 헌 집을 다듬고 고치기 시작하면서 승민과 서연의 스무 살적 기억도 다시 지어진다. 밑그림을 그리고 벽돌을 올리면서 단장되어 가는 옛집의 모습처럼 미숙함과 오해 속에서 헝클어진 지나간 시간들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아쉽고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첫사랑이 원래 잘 안 되라고 첫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지."

승민의 친구 납득이(조정석)의 말처럼 모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첫사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것이다. 긴 머리 찰랑이며 마음을 온통 사로잡던 첫사랑의 얼굴도, 혼자 이별하고 아파하며 울고불고 했던 그 시절도 결국 시간과 함께 모두 잊힌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과 더불어 우리도 늙어갈 것이다. 하여 병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서연의 눈빛에,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 후 혼자 남을 어머니를 걱정하며 바라보는 승민의 애잔한 눈빛에 더 마음이 아프고 쓸쓸해지는 것이다. 그 모습들이 결국에는 언젠가 맞이해야 할 우리의 모습이기에.

이처럼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아련함보다는 첫사랑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우울하고 쓸쓸함이 더 기억에 남는 영화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도 한참동안 귓가에 맴돌던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처럼, 미숙한 습작들로 채워진 우리의 삶을 쓸쓸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이다.

건축학개론 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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