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대선이 앞으로 채 100일도 남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계절, 하필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이 호명되었다. 폭군으로 혹은 비운의 임금으로 기록되는 사내. 그렇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이야기다.

폭군과 성군, 광해군의 '두 얼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천만을 바라보고 있는 영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천만을 바라보고 있는 영화 ⓒ (주)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기 전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은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광해군일까였다. 그동안 광해군은 조선 시대 사극에 자주 등장하던 태조, 태종, 세종, 연산군, 세조, 숙종, 영조, 정조 등 다른 왕들과 달리 대부분의 작품에서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 시대적 배경의 역할을 주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광해군을 영화 전면에 내세우다니. 도대체 왜?

사실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광해군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비록 당시에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군(君)'으로 강등되었지만, 광해군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그 평가가 극적으로 달라진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복동생을 죽이고 대비를 폐한 폭군이었건만, 오늘날에 와서는 임진왜란 이후 명-청을 상대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쳤던 성군으로 평가되는 광해군의 두 얼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두 명의 왕이라는 설정은 이와 같은 광해군의 양면성에 기초한다. 감독은 도저히 한 명의 왕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폭군과 성군의 간극을 진짜와 가짜 두 명의 왕으로 채운다. 빤하디 빤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왕자와 거지>류의 이야기를 그럴듯한 실제 인물에 대입시킴으로써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폭군 광해, 신경쇠약에 걸린 광해군의 모습

폭군 광해, 신경쇠약에 걸린 광해군의 모습 ⓒ (주)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광해군의 양면성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광해군의 양면성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 (주)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게다가 영화는 이와 함께 광해군 때 있었던 의문점을 하나 지목한다. 광해군 때 승정원일기가 장장 15일치나 사라졌다는 사실. 왕이 기침하는 것도 적어두는 기록의 왕국 조선에서 왕의 15일간의 행적이 사라지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광해군 일기에 적힌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마라" 라는 구절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수밖에. 과연 광해군은 무엇을 숨겨야 했으며, 15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영화처럼 정말 가짜 왕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픽션은 픽션이되, 기존에 존재하던 역사적 의문을 함께 버무려 관객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만든 영화. 결국 이와 같은 일말의 가능성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비슷한 줄거리로 앞서 개봉했지만 흥행에 실패한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물론 흥행은 기본적으로 주연 이병헌의 완벽한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와 함께 광해군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와 기존의 편견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광해군이 누구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영화에 대한 관객의 집중도를 높였다. 광해군이라는 인물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관객들이 영화에 담겨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게 만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왜 지금 '광해군'에 주목하는가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한 광해군의 삶. 그러나 그것만으로 영화가 광해군을 선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들은 지금까지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은 광해군을 불러낸 이 시대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대중의 욕구다. 현재 영화는 800만을 넘어 10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영화의 메시지에 동감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마따나 '사극은 어느 시대를 말하는가 보다 어느 시대에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라지 않던가.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는 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있으며 또 영화를 통해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흥미로운 인물 왜 하필 광해군인가.

흥미로운 인물 왜 하필 광해군인가. ⓒ (주)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보다시피 광해군의 집권 당시는 매우 어지러운 시대였다. 임진왜란 이후 국내 정세는 왕이 자신의 안위조차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으며, 외적으로는 명청교체기와 맞물려 둘 중 어느 국가를 선택하느냐에 조선의 존망이 걸려있었다. 왕이 누구냐에 따라, 왕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시대.

결국 광해군이 하필 지금 이 시기에 호명된 것은, 영화 속 시대와 지금 이 시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세대별, 계급별, 지역별로 분열되어 서로 으르렁거리고, 밖으로는 중국과 미국이라는 거대한 두 세력의 주도권 싸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망이 결정되는 이 시대가 4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한가운데 이번 2012년 대선이 위치해 있다. 전지구적으로 헤게모니의 전환이 필요한 이 시기에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올해 12월에 있다. 그러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영화 속 광해군을 보며 우리가 뽑아야 할 새로운 대통령상을 떠올릴 수밖에.

 임금의 하늘, 백성이 곧 하늘이다.

임금의 하늘, 백성이 곧 하늘이다. ⓒ (주)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영화가 광해군을 통해 이야기하는, 그리고 관객들이 호응하는 대통령상은 아주 원칙적이고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는 정치공학에 매몰되지 않고, 그야말로 국민들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그런 대통령이다. 자기가 남기는 음식을 궁녀들이 먹는다는 말에 몸소 소식을 실천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허례허식을 버리고 진정성으로 다가설 수 있는 지도자.

실제 광해군이 영화 속 가짜처럼 성군이었는지, 아님 폭군이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단지 영화 속 주인공일 따름이며,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메타포일 뿐이다. 우리는 그를 보며 이 시대에 걸맞은 대통령을 꿈꾸며, 2012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의 시대정신을 고민한다. 사람들이 영화의 관객 수에 관심이 많은 건 그만큼 영화가 제기한 고민을 많은 이들이 공유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시대정신의 기획자, 허균

 시대를 앞서간 사람 허균. 우리가 곧 허균이 되어야 한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허균. 우리가 곧 허균이 되어야 한다. ⓒ (주)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그럼 이번 대선에 누구를 뽑아야 영화 속 가짜 광해군 같은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바로 류승룡 역의 허균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바로 그 허균.

영화 속 허균은 단순히 광해군의 충복이 아니다. 비록 왕의 안위를 위해 가짜 하선을 들이고, 왕의 부재 시 왕의 입장에서 모든 업무를 대행하지만 이는 결코 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한 대의를 위한 행동이었다. 가짜 하선이 왕이 되겠다고 하자 왕을 시켜주겠노라고 이야기할 만큼, 광해군에게 칼을 바치며 두 임금을 섬기었다고 이야기할 만큼 허균은 시대에 대한 고민이 강한 사람이다.

추측컨대, 아마 실제 역사에서도 광해군과 허균의 사이는 남달랐을 것이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의 서러움을 '홍길동전'으로 비판한 만큼 서자 출신인 광해군은 그를 총애했을 테지만, 역성혁명이란 죽음의 명분에서 보듯이 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서 서얼철폐를 외치고 율도국을 그려낸 이가 조선시대에서 어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오히려 21세기 대한민국은 허균과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한다. 역도의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시대정신을 고민할 수 있는 사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은 광해군이 아니라 허균이다. 지도자를 지도자처럼 만들고 채찍질 할 수 있는, 노회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 지도자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인물 혹은 세력이 필요하다. 어차피 민주공화국체제에서는 최고 지도자 대통령의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가. 따라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어떻게 이용하냐는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그만큼 소통이 가능한 지도자를 뽑는다는 것이 전제가 되겠지만.

혹자들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용상에 앉은 하선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부끄러운지를 알아야지'하며 꾸짖는 장면에서 눈물을 훔쳤다는 그들. (물론 명-청 사이에서 어설픈 중립외교를 펴다가 폐위당한 무능한 광해군과 노 전 대통령을 비교한 <조선일보> 이한우 기획취재부장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노무현을 뛰어넘어야 한다. 참여정부의 과는 허균 같은 이가 부족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허균이 돼야 과를 극복할 수 있다. 가짜 광해군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뽑은 뒤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부디 영화가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를 바란다.

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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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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