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이송희일의 퀴어 연작 세 편을 내리 본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었다. 전까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많았지만 애써 보기를 미룬 채 오로지 그 영화들에 대해서 집중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것도 영화가 전해주는 이야기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 난 세 편 중 마지막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마치 도착점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는 연작 중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졌으며, 러닝 타임 역시 가장 짧은 작품(37분)이다. 세 작품에 대한 질과 온도의 문제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연작같지 않은 연작이라고 할지언정 세 작품은 교묘하게 닮아있고, 이송희일의 색채가 강렬히 드러난 작품이기도 해서 그걸 논하는 것들은 무의미하다.

<지난 여름, 갑자기>는 강렬한 이미지도, 폭발하는 사건도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영화이다. 내가 이 영화를 마지막에 선택한 이유는 오히려 눈과 머리보다 가슴을 강타했던 마지막 장면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진 창문 밖 석양의 모습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그래, '고요했다'는 그 말이 어울릴 것이다. 인물들 너머로 비춰지는 그 석양의 빛들 때문에 난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미루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두 사람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두 사람 ⓒ 시네마달


상우(한주완)는 경훈(김영재)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비밀을 알고 난 이후부터 그가 더욱더 좋아지지만 경훈은 한 번도 상우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더위가 내린 한낮의 하교길, 상우는 결심한다. 경훈에게 찾아가기로. 경훈의 집 앞에서 당당하게 상우는 그를 기다린다. 가정방문을 위해서 차로 나온 경훈은 그런 그를 본 체 만 체 하지만 이미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상우를 어찌할 도리 없이 내버려 둔다. 경훈이 상우를 멀리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우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가 바로 자신의 제자라는 이유때문이다.

한강까지 이르게 된 둘은 유람선을 타게 된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했던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던 상우. 경훈이 유람선을 타보고 싶었던 것 역시 그 기억 때문이다. 멋진 로맨스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의 유람선 동행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게 된다. 더럽다고 말하지만 푸른 강물의 물결이 흔들리는 햇살과 함께 그들 앞에 놓여진다. 숨막힐 듯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둘은 결코 표현하지 않지만 그들 사이로 흐르는 강물의 물결은 숨김이 없다. 

 황홀한 라스트 신

황홀한 라스트 신 ⓒ 시네마달


상우를 위해 상처주는 말을 내뱉은 경훈은 사실 수업 중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존재가 상우라는 것을 안다. 교사와 제자라는 관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감정의 끈을 이으려 하지 않는 경훈은 다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상우의 뺨을 힘껏 때리지만 끝끝내 끝끝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상우를 부둥켜 안고 손으로 그의 등을 감싸는 순간, 낮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눈부신 석양이 찾아온다. 어둡게 찍혀진 이 장면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 강렬한 석양뿐 아니라 경훈의 두 손의 움직임. 상우의 등 아래를 감싸 안은 손은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경훈의 마음이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표현되고 있었다. 상우만이 알 수 있는 그 비밀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을까?

이송희일 지난여름, 갑자기 한주완 김영재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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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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