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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주말드라마 <내 딸 서영이>가 50부작이란 긴 터널을 지나 유종의 미를 거뒀다. 주인공 이서영(이보영 분)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을 밀도 있게 그려낸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역시 이삼재(천호진 분)다.

아내의 죽음과 딸의 결혼으로 인해 잃어버린 부정을 회복해가는 그의 모습은 <내 딸 서영이>의 처음과 끝을 관통해 진한 감동과 여운을 전해줬다. 또한 강기범(최정호 분)과 최민석(홍요섭 분)을 통한, 전혀 다른 지점에서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모습 역시 인상적으로 남았다.

 <내 딸 서영이>에서 '이삼재'역을 맡은 배우 천호진

<내 딸 서영이>에서 '이삼재'역을 맡은 배우 천호진 ⓒ KBS


'극도의 자기희생'으로 다시 태어난 이삼재

극 중 삼재는 사랑하는 딸 서영이를 위해 극도의 '자기희생'을 보여준다. 그는 딸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매번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아버지다. 한 때의 방황으로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당했지만, 그 또한 딸의 인생을 위해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위를 대신해 교통사고를 당하고, 종국에는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세상에 저런 아버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무조건적인 헌신이다.

그는 도대체 왜 이런 자기희생을 보여준 것일까. 사실 이 절절한 부정의 기저에는 진한 '자기연민'이 내재되어 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서영이의 결혼 등 감당하기 힘든 일련의 사건 속에서 그는 한 없이 무기력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남아있는 모든 이에게 무거운 십자가이자 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아버지로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끝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삼재 스스로 토로했듯, 딸 서영이의 비밀 결혼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계속 망나니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영이의 결혼을 통해 그는 방탕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엄청난 무게감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다. 인간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이유를 '상실'했던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왜 내가 존재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삼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줬던 놀라운 부정은 바로 이 부분과 맞닿아 있다. 삼재에게 '아버지로서 존재감을 회복하는 것'이란 곧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가 자식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라고 해서 미안하다. 나를 위해서였다"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게 부정이란 자식들과 자신을 이어줄 마지막 끈이자, 스스로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내 딸 서영이>의 마지막 회에서 삼재는 자식들의 존경과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을 회복하며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게 됐다. 그토록 원했던 '존재의 이유'를 확인받은 삼재에게 이 보다 더 좋은 결말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 딸 서영이>의 결말이 잔잔한 감동과 함께 진한 여운을 남긴 이유다.

 <내 딸 서영이>에서 '강기범' 역을 맡은 배우 최정호

<내 딸 서영이>에서 '강기범' 역을 맡은 배우 최정호 ⓒ KBS


권위를 버리고 가장으로 우뚝 선 강기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스타일의 가장 강기범은 정략적으로 결혼한 차지선(김혜옥 분)에게 별 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남자였다. 밖에서는 위너스 그룹 최고 경영자로서 많은 존경과 찬사를 받고 살지만 집안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외로운 가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그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은 단연 아내 차지선과의 불화에 있다. 아내와의 불화가 종국에는 자식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도 큰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극 초반 우재(이상윤 분)를 비롯한 자식들이 강기범을 매우 적대시한 이유는 아버지인 그를 다름 아닌 '엄마의 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웠던 그도 실상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매우 불안정한 위치에 서 있는 미약한 존재였던 셈이다.

재밌는 것은 강기점이 성재를 둘러싼 출생의 비밀, 차지선과의 이혼 해프닝 등을 겪으며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아내와 극적인 화해를 해 나가면서 그는 좋은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 무엇인지 어렴풋이 배워나간다. 강기범이 가정 내에서 존재감을 회복해 나간 과정이 차지선과의 관계를 회복해 나간 과정과 일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가부장의 권위를 버림으로써 제대로 된 가장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이 강기범에게 바란 것은 다름 아닌 대화와 소통, 그리고 숨김없는 애정표현이었다. 서툴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가족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색하지만 아름다워 보인다.  

 <내 딸 서영이>에서 '최진석' 역을 맡은 배우 홍요섭

<내 딸 서영이>에서 '최진석' 역을 맡은 배우 홍요섭 ⓒ KBS


스스로의 꿈을 펼친 아버지, 최진석

이삼재, 강기범과 달리 최진석은 평범한 가장의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구현해 낸 캐릭터다. 평생을 열심히 일했지만 갑작스런 실직 후 삶의 허무를 느끼는 그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50~60대 남성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가정 내에서의 실질적 주도권은 모두 아내에게 넘어가 있어 그는 마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는 꿈을 찾아 떠나는 나름의 일탈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회복해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내 김강순(송옥숙 분)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자식들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가족들의 찬성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였고, 이는 배우로서 제 2의 인생을 걸어가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결국 이혼까지 불사할 만큼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진석의 태도에 강순과 경호(심형탁 분) 모두 두 손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아내와 자식을 모두 버리고 자신만을 탐구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초라하지 않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한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 딸 서영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아버지들의 '성장일기'였다. 이삼재, 강기범, 최진석은 자신들만의 방법과 도전으로 나름의 존재감을 되찾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됐다. 그들은 과연 끝까지 '멋진 남편' '멋진 아버지'로 남을 수 있을까. <내 딸 서영이>는 끝났지만 왠지 세 아버지들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만 같다.

내 딸 서영이 천호진 최정호 홍요섭 이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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