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3일, <설국열차>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작인 <마더>에서와 같은 절망의 나락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체제를 유지하려는 독재자의 논리는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지만 그건 말의 논리일 뿐이다. … 그 세계의 진실을 본다면 인간은 결국 절망적인 시스템으로부터 탈출을 선택할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따져볼 게 있다. 그는 왜 이 영화에서 지하 벙커나 거대한 빌딩 대신에 열차를 선택한 걸까. 내가 보기에 빙하기라는 환경 조건에서라면 열차보다는 지하 벙커나 거대한 빌딩 같은 것이 운용의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더 이로울 것 같은데 말이다. 열차가 갖는 다채로운 상징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 보자.

열차는 근대의 산물이다. 19세기에 최초로 출현한 열차는 원래 마차를 대신하는 운송수단으로 만들어졌다. 초창기 증기열차는 다양한 기능을 했던 마차 종류, 곧 짐마차나 우편마차, 승객 운송용 마차를 한 대의 기관차에 길게 이어붙인 형태였다.

열차는 태생적으로 차별적인 신분 계급제에 따라 공간이 구획되었다. 1 · 2등석과 같은 상등석은 기존의 호화로운 마차 승객칸을 그대로 옮겨놓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하등석인 3등석이나 4등석은 1800년대 중반경까지 지붕 덮개조차 없었다. 하등석은 덮개가 생긴 후에도 폐쇄적인 화물차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갈수록 점점 좋아지는 '윌포드'(열차의 설계자이자 지배자)의 열차는 그런 위계성을 잘 반영한다.

근대의 출발을 알린 열차는 체계적으로 잘 짜인 철도망 시스템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달린다. 대륙을 횡단하기도 하는 열차를 위해 표준시가 도입되기도 했다. 열차 안에서의 공간 활용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객실에 있는 승객들 또한 일정한 행동 반경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열차는 엄격한 관리와 통제를 바탕으로 한 획일주의에 지배되는 공간이다. 직진하면서 질주하는 열차가 표준화(또는 획일화)로 대표되는 근대의 탁월한 상징물로 즐겨 사용되는 까닭이다.

열차를 탄다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역설(逆說)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열차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매개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열차를 탈 때 미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을 갖는다. 열차는 정지해 있는 공간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역동적인 동영상으로 변화시킨다. 열차 여행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동시에 열차는 탈선과 충돌의 위험성을 갖는다. 질주하는 열차의 탈선과 충돌은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공포를 자아낸다. 우리가 열차 안에서 맞닥뜨리는 첫 번째 역설의 경험이다.

우리는 각자의 의지에 따라 열차에 탄다.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각자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열차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 마음대로 열차에서 내릴 수 없다. 아니 내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시급한 일이 생겨도 질주하는 열차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시스템의 교란이 가져오는 위험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능동적인 의지를 발휘하는 주체의 위상을 갖는 것은 열차에 올라타는 딱 그 순간까지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하는 순간 우리는 피동적인 객체로 전락한다. 열차 안에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거나 눈을 감은 채 잠을 잔다. 그때 우리는 짐짝처럼 이동의 대상이 된다. 대신 이동 수단이자 대상이었던 열차가 주체의 자리를 꿰찬다. 열차 탑승의 두번째 역설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꼬리칸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친 후 열차에 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작 만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열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열차에 올라타려는 처절한 사투를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열차에 오르지 못하면 죽음이 기다리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들 모두 의지의 초과잉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차에 오르자마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짝 신세가 된다. 철저하게 대상으로 전락한 그들은 처음 한동안 서로를 잡아먹는 아비규환을 겪기도 한다. 신성한 열차(윌포드)의 눈에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적절한 수로 통제되면서 필요할 때 일손을 공급하거나 아이를 생산해내는 자원일 뿐이다.

적어도 감독의 말을 따르면, <설국열차> 속의 열차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체제를 상징한다. 그 체제는 '절망적인 시스템'으로 유지된다. 시스템이 절망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운명은 처음 열차에 올라탄 그 순간 결정된다. 꼬리칸 사람들이 처음에 아비규환의 삶을 살게 된 것도 그런 운명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포함하여 기차 안의 모든 사람)은 그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변화의 꿈이 거세된 현실은 절망적이다.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이 시작되는 지점은 '여기'

설국열차 포스터 설국열차 포스터

▲ 설국열차 포스터 설국열차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커티스'를 대장으로 한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이 시작되는 지점이 여기다. 그들이 꼬리칸에서 지낸 기간은 17년이다. 폐쇄 공포증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은 만한 시간이다. 꼬리칸을 벗어나는 변화가 절박했던 이유다. 그들이 주 식량인 단백질 바를 버리며 치킨이나 스테이크를 외치는 장면은 변화를 향한 갈망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커티스가 이끈 반란은 일단 성공한다. '변화'라는 관점에 서는 한, 반란은 꼬리칸을 벗어나는 순간 이미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커티스는 멈추지 않는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열차의 설계자이자 신성한 엔진을 지키는 독재자 윌포드의 말을 들으면서 반란(변화)이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통절하게 깨닫는다. 엄밀히 말하면 설득당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커티스는 자신이 이끈 반란이, 윌포드가 열차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사전 기획한 것임도 알게 된다. 꼬리칸 사람들이 일으킨 반란이, 독재자 윌포드가 인위적인 방식으로 조절해야 하는 '74%'(아마도 열차의 최대 정원 대비 적정 정원 수를 수치화한 것이리라. '100%'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를 아주 자연스럽게 맞출 수 있도록 해 주는 필수적인 과정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74%'라는 수치나 (윌포드에 의해 기획된)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은, 아주 강하게 전쟁을 통한 인구 조절론을 환기한다.

윌포드의 열차가 전 세계를 쉬지 않고 순환한다는 점이야말로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는 반란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가 아닐까. 성공한 반란은 지배자의 교체일 뿐이다. 그리하여 시스템은 종식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커티스를 포함하여 꼬리칸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한 변화가 가짜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진정한' 절망의 순간에 윌포드가 커티스를 열차의 새 지배자로 점지하고, 커티스가 (잠깐이지만) 윌포드를 받아들이는 이야기 전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커티스는 그러한 절망적인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스템을 끝장낼 수는 없었다. 그 절망적인 진실에도 그는 열차 시스템 안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엔진의 부속처럼 들어가 있는 아이를 꺼내면서 팔을 잃는 장면이 이를 상징한다(꼬리칸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체의 일부를 잃는 희생을 치러야 한다).

결국 '설국열차'는 열차의 보안 설계자인 '남궁민수'의 손에서 끝장난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절망적인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이 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궁민수는 이 작품에서 감독의 주제의식을 가장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남궁민수가 머리칸에서 폭약을 설치할 때, 그는 독재자 윌포드가 지배하는 절망적인 시스템의 진실을 깨달았을까. 영화만 보아서는 왜 그가 환각 물질인 크로놀로 폭약을 만들어 열차를 전복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적어도 그는, 윌포드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커티스와는 달리, 절망적인 시스템을 지배하는 독재자의 논리에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었어야 한다(반박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말이 없다. 그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막연한 희망(추락한 비행기에 대한 그의 언급을 상기하자)에만 의지한 채 무모한 탈출극을 벌이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다.

이제 우리 현실을 돌아보자. 나는 많은 사람이 체제를 유지하려는 독재자(권력자라고 해도 무방하다)들의 그럴듯한 논리를 훤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 사람들에게 당연한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절망적인 시스템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근론이나 채찍론을 통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에 복무하는 사람들에게 시스템은 풍요와 안정이라는 당근을 선사한다. 그 당근의 유혹은, 우리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우리 스스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채찍론은 그 반대의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한다.

하지만 당근론이나 채찍론보다 더 본질적인 설명법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이 거대한 시스템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모른다. 현재의 시스템이 아닌 다른 무엇이 우리의 또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할지 그 누구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 미지의 세계는 때론 매혹적이지만 대개 공포를 수반한다. 절망적인 시스템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탈출을 감행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감독의 메시지는?

그럼에도 절망의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감독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감독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차원에서 말하건대,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데 어떤 치밀한 논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 바깥에서 우리를 향해 오라고 손을 흔드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천신만고 끝에 시스템에서 벗어난 '요나'(남궁민수의 딸)의 눈에 띈 백곰처럼, 우리 앞에 우연히 나타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남궁민수와 같은 돈키호테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총 제작비를 430억 원이나 들여 전하려던 메시지치고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대안 없이 안이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바탕 화끈한 블록버스터를 기대한 관객으로 하여금 팝콘이나 콜라를 집어들게 한 대신 이런 진지한(?) 메시지를 되작거리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충분히 의의가 있지 않을까.

바라건대 <설국열차> 속편을 통해 시스템을 폭파하고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에게 더 멋지게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게는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론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평자의 말마따나, 그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성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지금 설왕설래하고 있는 '진정한 봉준호 표' 영화에 관한 논란도 그때서야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설국열차>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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