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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 경기 직후 SBS 인터뷰 중 눈물을 훔친 김연아 선수.

프리 경기 직후 SBS 인터뷰 중 눈물을 훔친 김연아 선수. ⓒ SBS


프리 경기를 마친 아사다 마오의 눈물은 오열에 가까웠다. 지난 20일(아래 한국시간) 쇼트 경기에서 16위에 그친 아사다 마오는 음악이 그치기가 무섭게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프리스케이팅 합계 전체 6위. 21일 김연아 선수와 마찬가지로 현역 은퇴 경기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은 이가 흘리는 눈물은 국적을 불문하고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연아는 의연했다. 쇼트까지 1위를 지켰던 이 디펜딩 챔피언은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금메달을 놓친 경기 결과에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눈물이 공개된 것은 경기 직후 인터뷰 자리였다. SBS 방상아 해설위원이 "고마워, 알지? 너는 최고야"라며 포옹해 주는 순간, 김연아는 참았던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제 진심을 온전히 알아봐 주는 이를 마주했을 때 어쩔 수 없이 흐르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 인터뷰를 통해 이제는 온국민이 공감하게 됐다. 그러나 김연아에게 놀란 순간은 그 다음이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마오 선수보다 더 분개해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하지 않을 장면에서도 24살 김연아 선수는 의연했다.

오히려 "수많은 선택을 했고, 소치에 오기까지 결정이 너무나 힘들었는데, 어떻게든 선택했던 일이 잘 끝나서 기분이 좋습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더 분개하고 있을 팬들을 헤아리는 강한 '멘탈'을 보여줬다. 경기를 지켜 본 팬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는 이랬다. 짧은 순간,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12살 때부터 자신과 함께 성장한 팬들의 마음까지도 구체적인 표현 없이 헤아린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부터 언론에 나왔고, 지금 나이를 먹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요. 그때부터 지켜봐 온 분들은 그만큼 세월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저와 비슷한 마음을 가져 주시는 것 같아요. 우여곡절도 많았으니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셨을까요."

러시아 향한 분노로 대동단결된 소치 동계올림픽

그 '비슷한 감정'의 요체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였으리라. 이 분노는 경기 직후 김연아나 김연아 팬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급격히 전세계로 퍼져나가 폐막식이 거행되는 23일까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21일 새벽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김연아의 2위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들썩였다. SNS가 요동쳤고, (러시아와 관계가 좋을리 없는) 미국을 위시한 외신들도 앞장섰다.

가장 발 빨랐던 건 역시나 트위터였다. 공식 트위터 계정은 'YUNA KIM'의 연관 검색어로 'nbc olympics(NBC 올림픽), adelina sotnikova(아델리나 소트니코바), yuna kim robbed(메달을 빼앗긴 김연아), yuna kim overrated(과대평가된 김연아), rigged(조작)' 등을 올려놓으며 전 세계 여론을 반영했다.

외신 중 가장 센 표현은 역시나 미국 언론에서 나왔다. 미국 NBC는 공식 트위터를 통해 "김연아 은메달, 소트니코바 금메달, 결과에 동의하는가?"란 게시물로 의문을 표했다. ESPN은 아예 "Home Cooking(홈 쿠킹)"이란 비아냥에 이어 "Home Ice Advantage(홈 아이스 어드밴티지)"란 표현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국내 매체들의 '분노'에 가까운 반응들은 예상가능한 결과였다. 대신 네티즌들이 이미 준비하고 있던 '연아야 고마워', '고마워 연아야'란 검색어가 새벽부터 온종일 순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이게 다 경기 직후인 21일 새벽과 아침 사이에 시작된 후폭풍이었다.

급기야 한 캐나다인이 국제 청원 사이트인 '체인지'(Change.org)에 올린 '소치올림픽 여자 피겨스테이팅 재심 요구' 청원은 23일 오전까지 193만 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에선 대한빙상경기연맹이 국제빙상연맹(ISU)에 정식 항의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일부 팬들은 김연아 선수에게 '국민 메달'을 수여하겠다며 모금운동에 들어갔고, 21일부터 단 이틀간 4만 3천여 명이 참여, 금메달 값으로 1500만 원을 모금했다.

한국인들의 대리전... 연아를 위해?

 피겨여왕 김연아가 21일 오전 (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프로그램에서 무결점 연기를 마친 뒤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김연아는 러시아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피겨여왕 김연아가 21일 오전 (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프로그램에서 무결점 연기를 마친 뒤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분노가 '악의'가 되는 것은 순간이다. 러시아와 푸틴, 소트니코바 선수에 대한 악의 넘치는 글들이 기록돼 광활한 넷 공간을 떠도는 것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심지어 평창에서 되갚아주겠단 장삼이사들의 혈기도 이해가 된다. 판정 논란으로 인해 심심치 않게 들렸던 '동계올림픽에서 피겨를 폐지하자'는 다소 과격한 목소리까지 다시금 일고 있다. 이 모든 악의엔 ISU가 요지부동인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23일 오전에는 러시아 피겨 관계자의 인터뷰를 인용, ISU가 한국의 항의를 기각했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18년간 스케이트를 타면서 피겨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작성한 이 피겨약소국의 유일무이한 존재를 위한 대리전. 이미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에서 '오노 사건'으로 금메달을 박탈 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한국 국민들에게 이제 전세계로 열린 인터넷망과 SNS는 좋은 무기가 되어주고 있다. 러시아와 여전히 불편한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여론 역시 지원군이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는 이미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다. 은퇴를 예고한 '여왕 이후'를 근심하는 국제 빙상계의 '스타탄생'에 대한 목마름과 편파 판정 시비가 일 수밖에 없는 개최국 러시아의 심판진 구성, 국제무대에서 별다른 지분을 갖지 못한 국내 빙상계의 무기력함을 포함한 이 모든 알력과 부조리와 불공정함을 스스로 맞서 이겨낸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경기를 본 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최상의 은퇴 경기를 연기해냄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김연아 개인은 자신에게 지워진 무겁고도 막중한 짐을 비로소 내려놓게 됐다. 대한민국이 바로 김연아, 라던 국가주의의 무게도, 금메달을 당연시했던 시선에서도 가벼워졌다. 아직도 대리전을 자처하는 이들을 뒤로 한 채로. 그래서 김연아가 갈라쇼에서 들려준 노래 '이매진'은 한층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김연아가 이겼고, 러시아가 졌다

 소치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갈라쇼를 끝낸 김연아 선수.

소치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갈라쇼를 끝낸 김연아 선수. ⓒ SBS


"국경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서로 죽일 일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겠죠",
"언젠간 당신도 하나 되는 세상에서 함께 하길 꿈꿔요."
"내 것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탐욕도 궁핍도 없고 인류애가 넘치는 세상을 나누어요."

이렇게 이 '이매진'의 가사는 작게는 경기 결과를 두고 자기들만의 전쟁을 벌일 팬들과 국민들에게, 크게는 올림픽 전부터 인권 문제로 비난을 받아 왔던 러시아와 그들의 이해가 개입된 우크라이나 시위 유혈 사태에 전하는 은유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존 레논이 원곡을 부르던 그때, 강력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로 기능했음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반면, 소탐대실의 탐욕으로 스캔들마저 일으킨 러시아는 동성애자 인권탄압 등과 함께 저개발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국가주의 1등 이미지를 더욱 더 공고히 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거세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스타로 키우려던 소트니코바 선수의 앞날에 부담과 비난이란 먹구름을 드리게 된 꼴이 됐다. 결국 김연아가 이겼고, 러시아가 졌다. 

금메달은 잃었지만, 그렇게 오히려 얻은 게 더 많아 보이는 김연아는 '전설'이 됐다. 피겨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종목 자체에 대한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잘 알려진 대로, 미비한 협회 지원과 그에 반하는 압도적인 국민적 관심, 고된 훈련과 10대를 지나 20대를 맞은 육체적 피로에도 불구하고, 김연아 선수는 오롯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결과보다 오로지 "준비했던 경기를 실수 없이 완수한 것"에 더 만족하는 김연아.

그렇게 김연아는 '김연아는 대한민국이 아니다'를 온 몸으로 입증시켰다. 마지막까지도 '이매진'을 선택한 김연아의 눈물은 그래서 더 값지고 의미로 충만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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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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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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