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유럽의 강호 벨기에와 2014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H조 '운명의 최종전'(27일 오전 5시)을 남겨두고 있다.

벨기에는 2연승으로 이미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가운데 한국(승점 1·1무1패·골득실 -2)은 알제리(승점 3·1승1패·골득실 +1), 러시아(승점 1·1무1패·골득실 -1)에 밀려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려면 최종전에서 벨기에를 꺾고, 러시아와 알제리의 경기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확률적으로는 분명히 '기적'에 가까운 도전이다.

'의리사커'는 계속될 것인가

빗나간 골에 터져나오는 탄성 23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알제리전 거리응원을 나온 시민들이 골이 빗나가자 탄성을 지르고 있다.

▲ 빗나간 골에 터져나오는 탄성 23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알제리전 거리응원을 나온 시민들이 골이 빗나가자 탄성을 지르고 있다. ⓒ 이희훈


최종전을 앞둔 '홍명보호'의 화두는 여전히 '의리사커'다. 지난 알제리전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홍명보 감독의 선수 운용이 도마에 올랐다. 홍명보 감독이 '의리'로 중용했다는 비판을 받은 박주영, 정성룡, 김영권, 홍정호, 윤석영 등 소위 '런던올림픽 멤버'들의 동반 부진이 대패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마지막 경기인 만큼 벨기에전에서는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그간 홍 감독의 보수적인 성향을 감안할 때, 모험보다 안정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사실 의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일단 변화를 주고 싶어도 홍 감독이 꺼내들 수 있는 카드 자체가 많지 않다. 공격진에서 박주영을 빼고 김신욱이나 이근호를 넣거나, 골키퍼 정성룡을 빼고 김승규를 넣은 소폭의 변화 정도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공격수를 늘린다거나 라인을 크게 끌어올리는 등 대대적인 전술 변화는 쉽지 않아보인다. 감독이 1년 동안 추구해온 스타일을 포기하고 이제 와서 갑작스럽게 시도해 보지 않은 베스트 멤버와 전술을 구사하려 드는 것은 도리어 긁어부스럼이 될 위험부담도 크다.

홍명보 감독의 최대 약점이 바로 경험 부족으로 인한 '전술적 경직성'이다. 이는 지금의 대표팀을 위기로 몰아넣은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홍 감독은 대표팀 출범 때부터 줄곧 수비 위주의 4-2-3-1 전술을 고수해 왔고 여간해서 변화를 주지 않았다.

최종 엔트리 또한 포지션별 복수 원칙에 맞게 비슷비슷한 성향의 선수들 위주로 구성했다. 다시 말하면 준비된 전술이 먹힐 때는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플랜 B(대안)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역시 홍명보 감독이 자초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홍 감독의 의지 여부다. 진정한 승부사라면 과감하게 모험을 걸수 있는 용기도 필요해 보인다. 어차피 이제는 박주영-정성룡을 기용해도 욕을 먹고, 기용안 해도 욕을 먹는 것은 마찬가지다. 단지 비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고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도 지도자의 덕목이다.

박주영 등 몇몇 선수들은 이미 충분히 기회를 얻었고 애석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야 할 차례다. 대체자들 역시 부진할 가능성도 있지만, 기존 주전들이 무능하여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이기에 변화를 주는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못하는 선수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 대표팀에 더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손흥민, 김신욱, 이근호 등은 홍 감독의 전술 성향상 베스트 옵션은 아니었지만 지난 경기들을 통해 충분히 대표팀의 주역이 될 만한 능력을 이미 입증했다.

벨기에의 오만함을 저격하라

붉은 물결 이룬 응원 인파 23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전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 붉은 물결 이룬 응원 인파 23일 오전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전 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 이희훈


이미 16강을 확정한 벨기에는 외형상 한국전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눈치다. 일부 주전급 선수들이 결장할 것이 예상되고 몇몇 선수는 대회 기간 중 골프를 치는 등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이 SNS 등에 올라오기도 했다. 벨기에의 노골적인 자만심과 무시는 한국에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1.5군을 내보낸다고 해서 벨기에의 전력이 반드시 약해진다는 보장은 없다. 벨기에 선수들은 대부분이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 중이고 단지 주전 몇 명이 빠진다고 해서 한국이 만만히 볼 레벨의 팀은 아니다.

월드컵 무대에 처음 출전하는 벨기에의 비주전들은 한국전이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절호의 기회이기에 더 큰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이미 16강을 확정하고 비기기만 해도 조 1위가 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오히려 한국전에서 벨기에 선수들이 충분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벨기에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정도로 약점이 없는 팀도 아니라는 점이다. 알제리와 러시아전에서 벨기에는 이기기는 했어도 경기를 주도하지는 못했다. 두 경기 모두 흐름상 벨기에가 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선수들의 뛰어난 개인 능력을 바탕으로 불리한 흐름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한 방'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90분 내내 일관된 경기를 유지할 수 있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수비 조직력도 아직 불안정하다. 최소한 한국이 1~2골 정도는 충분히 노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벨기에를 상대한 알제리와 러시아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두 팀 모두 벨기에전에서는 수비적으로 나섰지만 경기 운영의 완성도가 떨어졌다. 알제리는 선제골을 넣은 후 너무 일찍 수세적인 경기 운영을 펼치다가 오히려 주도권을 빼앗기고 역전을 허용했다. 한국전에서 보여준 공격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알제리보다 수비적인 색깔이 더 강한 러시아는 후반 중반까지 벨기에를 거의 완벽하게 차단했지만, 지나치게 부정확한 패스와 느린 템포의 경기 운영으로 공수전환의 효율성이 떨어졌고 결국 후반 체력 저하로 자멸했다. 알제리와 러시아가 남긴 공통의 교훈은, 벨기에를 상대로 일단 수비를 중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역으로 수비에만 치중하다간 오히려 주도권을 내줄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점이다.

다득점이 필요하다고 무조건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자칫 선제골을 내주면 일본(vs. 콜롬비아전)처럼 회복불가능한 흐름으로 갈 수 있다. 어차피 벨기에도 부담 없는 한국전에서 굳이 수세로 나설 가능성이 없기에 한국은 안정적인 경기 운영으로 가다가 후반에 승부를 거는 전략도 나쁘지 않다.

최전방에는 최대한 빠른 선수들을 배치하여 기동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벨기에는 수비진의 제공권과 파워가 좋지만 상대적으로 전문 풀백요원이 부족하여 좌우측면의 오버래핑과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게 약점이다.

지난 조별리그 경기에서 다소 부진했던 이청용이나 박주영 대신 기동력과 활동량이 좋은 이근호를 선발 투입하여 왼쪽의 손흥민과 함께 측면 공격을 노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근호는 측면과 중앙이 모두 가능한 데다 유사시 원톱 역할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다기능 자원이다. 역습 상황에서 좌우로 폭넓게 움직이며 수비 배후를 침투하는 움직임은 오히려 폼이 떨어진 박주영이나 이청용보다 나을 수 있다.

홍명보 감독이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옵션이지만, 손흥민 역시 최전방 원톱이 가능한 카드다. 알제리전에서 기록한 손흥민의 골은 후방에서 한 번에 찔러준 패스를 트래핑하여 온전히 개인 능력으로 해결한 득점이었다. 박주영 같은 최전방 공격수가 해줘야 할 역할을 손흥민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다.

공수밸런스의 무게 중심은 중원 구성의 변화에 달렸다. 플레이 메이커인 기성용은 대표팀 중원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지만 지난 경기에서 수비력은 다소 아쉬웠다. 역습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기성용의 공격적 능력을 활용하려면, 기성용을 이전 경기보다 전진배치하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다소 부진하던 구자철을 최전방 공격수나 아예 조커로 돌리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기성용의 빈 자리에는 한국영과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을 더 투입하여 중원 압박을 강화할 수 있다. 벤치에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박종우가 있고, 왼쪽 수비가 전문인 박주호도 유사시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볼 수 있는 선수다. 알제리전의 스타였던 장신 공격수 김신욱이나 폼이 떨어진 박주영은 벨기에전에서는 후반 조커로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보인다. 어차피 물러날 곳이 없기에 기존에 시도해 보지 않은 과감한 기용이나 전술 변화도 염두에 둬야 한다.

다만 지난 알제리전에서 극심한 난조를 보인 수비진과 골키퍼는 벼랑끝 승부의 부담감을 감안할 때 다시 한 번 기존 포백과 정성룡에게 기회를 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승규는 경험이 부족하고 곽태휘, 황석호, 김창수 등 대체 자원들이 평가전 등에서 기존 주전들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16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시점에서 '16강 진출 여부'에 연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벨기에전 승패와 상관없이 알제리가 최종전에서 러시아를 잡으면 그대로 한국의 월드컵은 끝난다. 물론 산술적으로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자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목표에 연연하는 것은 기적이라기보다 '요행'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설사 그렇게 16강에 진출한다고 해도 한국 축구의 명예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경기에서 홍명보호가 찾아야할 것은 기적 이전에 '희망'이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홍명보호의 행보에 실망감을 느껴왔고, 그것은 단지 지난 알제리전의 완패로만 갑자기 생겨난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결과를 떠나 많은 팬들의 기억속에 항상 자부심과 애정의 대상이던 '대한민국 대표팀다운' 모습을 잃어 버렸다는 데서 비롯됐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월드컵의 강자라서, 늘 이기는 데 익숙하던 팀이라서 팬들이 응원해온 것은 아니다. 이미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상황에서 치러진 1998년 프랑스월드컵 최종전 벨기에전(1-1 무승부)가 좋은 예다.

지금도 객관적인 전력상 지금 우리 대표팀이 벨기에를 2골차, 3골차 이상으로 이길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미 탈락한 일본의 경우처럼 승리에 지나친 부담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단지 16년전의 벨기에전처럼, 승패를 떠나 마지막까지 후회없이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는 대표팀이라면, 팬들은 언제든지 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실패는 한국 축구에 조별리그 탈락의 아픔뿐 아니라 차범근이라는 영웅을 잃는 상처도 안겨줬다. 한국축구의 레전드에서 역적으로 전락하여 한동안 야인 신세가 되었던 차범근 감독이 복권되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2002 한일월드컵의 영웅이었던 홍명보 감독도 이번 월드컵의 부진과 의리사커 논란으로 평생 축구인으로 쌓아온 명예가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이번 월드컵으로 인하여 16강보다도 '홍명보'라는 레전드를 잃게 된다면 한국 축구로서는 더욱 뼈아픈 손실이 될 것이다.

벨기에전은 어쩌면 홍명보호라는 이름을 달고 마지막이 될지 모를 월드컵 경기다. 대표팀이 찾아야 할 진정한 목표는 승리나 16강이 아닌,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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