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비수사>의 곽경택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극비수사>의 곽경택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부산과 조폭 이야기, 남자들의 우정 하면 곽경택이었다. 때문에 한국 관객들은 그에 대한 평을 두고 양쪽으로 갈리곤 한다. 곧 개봉을 앞둔 <극비수사> 역시 겉만 보면 부산을 배경으로 했고, 형사 이야기다. <친구>와 <똥개> <태풍>의 연장선일 뿐일까? 지난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그를 만나 직접 물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1978년 어린이 유괴 사건의 진범을 가려낸 공길용 형사와 김중산 도사, 그러니까 말단 경찰과 점쟁이의 의기투합을 영화에 담았다. 무사안일과 편의주의를 거부하며 자신들의 소명의식을 지켰던 두 사람이 한 아이를 구했고, 한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주었다. 이런 시선을 투영한 것만으로도 일단 곽경택 감독의 새로운 시도라 할만하다.

조폭 다뤘던 감독이라 냉담했던 시선..."보기 보단 괜찮은 사람일세"

영화 구상은 <친구2>를 기획할 당시부터였다. 1970년대 건달 일화가 부족해보여 취재하던 중에 공길용 형사를 알게 됐고, 제주도에 머물던 공 형사를 대뜸 만나러 떠났다. 여러 이야기를 듣다 '김중산 도사가 아니었으면 한 유괴 사건 때 범인을 못 잡았을 것'이라는 말에 꽂혔다. 그 말에 김중산 도사를 접했고, 곧이어 <친구2>를 잠시 중단한 채 <극비수사>의 골격을 써놓게 된다.

"일단 개봉은 하게 돼서 마음은 좋다. 두 분에게 꼭 영화를 보여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거 같아서. 사실 두 분이 영화화 하는 것에 선뜻 동의하진 않으셨다. 본인들 이야기 때문에 (유괴 사건 피해자인) 또 다른 분들이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공길용 형사님을 내가 뵙기 전에 한 공중파 방송사에서 미니시리즈를 하겠다기에 단번에 거절했다더라. 그만큼 조심스러웠던 거다. 게다가 나에 대한 인식도 안 좋았다. 영화 <친구>로 조폭을 미화했다고 부정적이었는데 우연히 SBS <기적의 오디션>에 출연한 걸 보고 호감으로 바뀌었다고 하셨다(웃음)."

 영화 <극비수사>의 곽경택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단순하고 묵직하게 이야기를 밀고 갈 수 있었지만 <극비수사>로 곽 감독은 부산 형사들이 서울 형사들과 공조하는 장면을 넣으며 지역의 대조 효과도 노렸다. 수도 서울이 급격히 팽창하던 1970년대를 안고 들어간 거다. 곽경택 감독은 "서울이 아니면 다 지방이라고 부르던 당시 서울 외 지역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심했던 때였다. 간접적으로나마 그걸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하나 더. 영화를 관통하는 소신 혹은 소명의식은 감독이 작정하고 붙잡은 주제였다. 유괴 사건을 가지고 열린 결말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한 것에 곽 감독은 "모험이었지만 분명 따뜻함을 믿어 주실 거라 생각한다"며 운을 뗐다.

"공 형사님은 당시 술과 담배를 안 했고, 경찰들끼리 업소를 정해 술 마시는 등 일종의 관행을 거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왕따였지. 선배들이 말도 안 되는 심부름을 시켜도 해냈고, 범인을 하도 많이 잡아 그 성과를 선배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김중산 도사 역시 동시대 최고 스승을 뒀기에 그 빛에 가려져 있었는데 정의감이 유독 강한 분이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짜증나고 억울한 일도 겪는다. 그래서 일보다는 정치나 접대에 능해야 하나 고민하곤 한다. 타협이냐 소신이냐의 기로에서 전자만 대접 받으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겠나. 영화를 통해 이게 맞다 말하고 싶었다."

흔들리며 걸어온 감독의 길 "싸이에게도 영감을 준 거 보면 흐뭇"

 영화 <극비수사>의 곽경택 감독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이력으로만 치면 곽경택 감독은 젊은 나이에 미국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 1세대기도 하다. 영화 <친구>로 상업성을 인정받기 전까지 여러 단편을 만들며 실력을 쌓아온 그는 현지 학생들 사이에서 '런닝 곽'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만큼 뛰어 다니며 이야기를 찾고 촬영한다는 뜻이다.

유학 시절 이야기에 그는 "솔직히 말하면 부모 잘 둔 덕이라 상대적으로 기회를 못 갖는 사람들에겐 말하기 죄송한 이야기"라며 조심스러워 했다. 다만 애초에 광고나 찍으며 세계를 여행 다니겠다던 철없는 청년이 영화의 매력에 빠진 게 유학 생활 당시 경험 덕이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독한 스승을 만난 덕이었지. 굳이 비교하면 영화 <위플래시>의 플래처 같은 사람이었다. 날 보고 빨리 영화를 관두라고 말하곤 했다. 약이 올라 더 열심히 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영화 작업에 몰두 했다. 그땐 자다가 꿈을 꿔도 영화 찍는 꿈을 꿨다.

어느 순간 다른 학생들과 실력 차이가 벌어지더라. 자신감이 생겼고,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흥행에 관계없이 지금도 그때 마음으로 찍으려고 노력한다. 스승님과 연락? 최근에도 메일로 안부를 물었다. 아직 그 학교에 계시더라, 여전히 내게 새로움과 진실, 열정을 쫓으라고 조언하신다. 그분에게 난 영원한 학생이지(웃음)."

흥행 이야기가 나와서인데 <친구>로 성공 후 곽경택 감독이 평탄한 길을 간 건 아니다. 연이어 발표한 <챔피온> <태풍> <사랑> 등이 흥행에 실패했다. "실화는 이야기의 골격이 튼튼해서 어떤 가공을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분명한 영화관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번 금전적 빚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군가에게 영감을 얻고,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경험이 참 짜릿하다"고 덧붙였다. 이 지점에서 그는 싸이와의 인연을 언급했다 

"권투선수 김득구 이야기를 다룬 <챔피언>이 2002년 월드컵 때 개봉했는데 완전 참패했다. 내겐 끔찍한 악몽인데 당시 음악 감독이 말하길 싸이의 '챔피언'이란 노래가 내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고 하더라. 흐뭇했다. 나도 다른 영화나 예술 작품에서 감동 받으며 은연중에 영향 받았을 거다. 누군가의 성장에 도움 되면 작품으로서 기본은 했다고 생각한다.

분명 내가 <친구> 이후 상업성에서 이점이 있는 사람이 됐다는 건 고무적이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괴로웠지만 그걸 40대에 겪어서 다행이었다. 작년에 쉰이 됐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혼자 만세를 불렀다. 다시 그런 40대를 겪으라면 자신 없다. 못난 나의 연속이었다. 이제 조금 철 든 느낌이랄까. 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알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분명히 알았다.

영화 제작은 이제 안 할 거다. 연출만 할 건데 이것 역시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도태되는 만큼 치열하게 할 거다. 그리고 지금 영화를 찍고 있어서 행복하다. 다시 태어나서 <친구> 같은 영화를 찍는다는 보장도 없잖나. 한 번 뿐인 생 행복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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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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