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고래 '모비딕'은 <하트 오브 더 씨>에서 아주 조그만 캐릭터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거대한 고래 '모비딕'은 <하트 오브 더 씨>에서 아주 조그만 캐릭터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먼저 전혀 별개의 이야기 하나.

피터 잭슨이 2005년에 만든 영화 <킹콩>. 이 영화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두루 좋은 평가를 얻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게 뭐냐? 말 못하는 짐승(킹콩)에게 부여된 캐릭터(character) 때문이었다.

좋은 영화의 조건에는 수만 가지가 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캐릭터 설정'이다. 영화 속 화면에 등장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성격과 이미지, 개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영화는 살아 뛰는 생물이 된다. 캐릭터란 바로 이 '성격'과 '이미지', '개성'의 총체다.

원시의 정글 인도네시아 외딴섬에서 살던 괴물이 '문명의 절정' 뉴욕 출신의 금발머리 미인을 보게 되고, 그 미인에게 매료된 영혼 탓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 같은 종(種)이 아님에도 사랑하는 그 어떤 '암컷'(나오미 왓츠)을 위해 안타까이 가슴을 두드리고, 복엽기의 기총소사를 기꺼이 받아내며 죽음을 불사하는 웅장한 수컷. 이게 바로 킹콩에게 부여된 캐릭터고, 완성도 높은 그 캐릭터가 <킹콩>의 성공을 이끌었다.

<킹콩>의 사례에서 배워야 할 <하트 오브 더 씨>

이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로 돌아오자.

<신데렐라맨>과 <다빈치 코드>의 론 하워드가 신작을 들고 관객들과 만났다. 허먼 멜빌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쓴 소설 <모비딕>.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됐는지의 연원(淵源)을 파헤치는 스토리를 담은 <하트 오브 더 씨>. 한국 나이로 회갑을 넘긴 노장의 연출에 기대를 거는 관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웬걸. 뚜껑을 열어본 <하트 오브 더 씨>는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요리, 거기에 근사한 디저트까지 구비한 '잘 차려진 프랑스 정찬'일 것이란 기대를 배반하며, '깍두기에 식어터진 보리밥'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요약하기 쉬운 영화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요약이 쉽다는 건 그 영화 안에 복선과 은유, 상징과 드라마가 빠져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에. <하트 오브 더 씨>를 요약해보자.

'자존심 강한 일등항해사(크리스 헴스워스 분)와 오만한 부잣집 아들 출신 선장(킬리언 머피)이 짝을 이뤄 고래를 잡으러 간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헤매다 길이 30m의 거대한 향유고래를 만나 배는 침몰하고, 살아남은 21명의 선원들은 죽을 고생을 하다 구조된다.'

이것이다. 이것밖에 없다. 이처럼 초라한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에선 목선의 철구조물을 부수고, 강인한 선원들을 바다에 빠뜨리며, 끝까지 따라와 제 동족(고래)을 죽인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고래 '모비딕'의 캐릭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핵심이라 할 '모비딕'의 캐릭터가 생성되지 않으니, 등장하는 나머지 조연들(이 영화에선 인간들 모두가 조연이다)의 완성된 캐릭터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도 없다.

부서진 플롯

 소설 <모비딕>의 연원을 찾아가는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소설 <모비딕>의 연원을 찾아가는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형성되지 않는 캐릭터 위에 제대로 된 구성(plot)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니 <하트 오브 더 씨>는 영화가 상영시간 내내 보여주는 막막하고 공포스런 바다에 이른 선원들의 심경처럼 마구잡이로 헤매기만 한다. 배를 처음 타본 일곱 살 아이의 뱃멀미 같은 영화.

물론 할리우드가 동원한 자본의 힘은 <하트 오브 더 씨>에서도 간간히 보여진다. 컴퓨터그래픽임에 분명할 뒤채는 거대한 파도와 8만kg 거대 향유고래의 꼬리에 박살이 나는 19세기 허술한 목선, 신비로운 암청색으로 빛나는 바다의 빛깔 등. 그러나 이런 부수적 장식은 '맥락 없는 이야기'와 '무너진 캐릭터 형성' 속에서 힘을 잃는다.

한 때 론 하워드를 포함한 미국 할리우드의 가장 큰 적은 러시아였다. 왜 미국의 합리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가들을 경원했던가? 현실에서의 승리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견고한 차르(tsar) 독재에 저항한 비이성적인 태도 탓이었다. 차르에게 형을 잃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조차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의 싸움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나니 이젠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러시아 볼셰비키보다 더 용감해진 것 같다. <하트 오브 더 씨> 같은 걸 영화라고 만들어 자그마치 9000원을 주고 그걸 보라는 건 볼셰비키의 태도보다 훨씬 용감한 행위다. 더불어 뻔뻔하기까지 한.

○ 편집ㅣ이병한 기자


모비딕 론 하워드 하트 오브 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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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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