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캐릭터 포스터. 인물 뒤에 적힌 설명은 각각의 성격을 설명한다.

두 사람의 캐릭터 포스터. 인물 뒤에 적힌 설명은 각각의 성격을 설명한다. ⓒ (주)쇼박스


우연을 믿고 상대를 믿고 하룻밤 가능성에 몸을 던지기에는 현실적인 위험이 너무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TV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는 각종 범죄 소식은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는 일조차 꿈의 영역으로 남긴다. 그저 남은 것은 영화뿐인데, 영화마저 이제는 편하게 보지 못하겠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날의 분위기>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꼬시는' 재현(유연석 분)과 "안되는 거 참 많은" 철벽녀 수정(문채원 분)이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서 만나면서부터 시작한다. 수정은 툭하면 꺼져버리는 낡은 컴퓨터를 의리로 쓰는, '핑크'색이 어색한 화장품 마케팅 팀장이다. 10년 된 남자친구가 자신을 익숙하게 다루는 것 같아 서운하지만 언젠가는 결혼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농구공에 머리를 맞아 넘어지고,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블라우스를 적시는 뭔가 이상한 날, 출장길 기차에서 재현을 만난다. 스포츠 에이전트인 재현은 역에서 만난 수정에게 한눈에 반한다. 재현은 수정의 옆자리에 앉게 되고, 열차는 출발한다. 재현은 수정에게 말한다. "저 오늘 그쪽이랑 자려구요."

꽃이길 거부했더니 철벽녀가 됐다?

 둘의 여행은 한쪽에 힘이 실린 수레처럼 영화 내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진행된다. 과연 이 둘은 진철을 찾고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을까?

둘의 여행은 한쪽에 힘이 실린 수레처럼 영화 내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진행된다. 과연 이 둘은 진철을 찾고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을까? ⓒ (주)쇼박스


개봉 후 영화를 둘러싸고 많은 말이 오갔다. 여성혐오 코드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군가 <그날의 분위기>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면, 우리 사회가 가지는 성역할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정희진 박사는 칼럼에서 "여성과 남성이 모두 사람이거나 꽃일 때는 성희롱이 아니다. 하지만 남성은 사람인데 여성은 꽃이라면, 인권 침해가 된다"고 한국의 성역할에 대한 통념을 설명한다. 여성을 '꽃'으로 보는 관점은 여성을 누군가에게 꺾이거나 열 번 찍혀 넘어가는 존재로 묘사한다.

수정은 재현의 선언에 거부 표시를 나타낸다. 여기서 "노(no)"는 '거절'이다. 누가 대답하든 마찬가지다. 문제는 재현이 그녀의 대답을 "예스(yes)"로 만들려고 할 때부터 발생한다. 성희롱 또한 상대의 대답을 "예스(yes)"로 왜곡할 때 발생한다. 성희롱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과 관련된 언동으로 불쾌하고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하거나 고용상의 불이익 등 유무형의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상대방 의사에 관계없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지점이 자기중심성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은 아동기 특징 중 하나로, 매사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발달심리학자 피아제는 자기중심성을 4세에서 7세 사이 아동에게 나타나는 사고 특성이라고 봤다. 아동은 또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이때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때, 감정이입과 융통성이 떨어지는 '자기만 아는' 아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성희롱이 발생하는 많은 상황에서 가해자는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가진 의미만 그대로 전달되기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공적인 관계임에도 사적인 차원에서 발화가 발생하며, 그 기준이 상대에 있기에 주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할 때는 관계와 맥락을 고려한다.

두 주인공의 관계는 동등함과 거리가 멀다. 영화에서 수정은 회사 일 외에는 덜렁거리는 성격이다. 그녀의 실수는 재현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차에 노트북을 두고 내린다거나, 경쟁 PT에서 자신의 회사와 강진철이 이미 계약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진철과 계약을 해야 하고,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재현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수정의 행동도 재현에게 선택된다. 열차가 고장으로 멈췄을 때도 내릴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수정을 재현이 팔을 잡아 끌어내린다. 재현은 수정의 행동을 팔짱끼고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수정은 서사도 재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 10년 된 남자친구가 있고, 예쁘장한 얼굴 덕에 예전에도 꽤 인기가 있었다는 것 외에 수정에 대한 정보는 한정돼있다. 그러나 재현은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고향인 부산에서 학창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고 잘나가는 스포츠 에이전트가 됐으며, 이번 계약을 해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매끈한 화면 뒤에 숨겨진 함정

 중요한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비포 선라이즈>는 큰 사건 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중요한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비포 선라이즈>는 큰 사건 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 캐슬락엔터테인먼트


위키피디아는 로맨틱 코미디를 "남자와 여자가 만나지만, 초면의 인상이 나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지 못하고, 그 후에도 만날 때마다 말싸움을 하게 된다. 그런데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서로를 잘 알게되어 끌린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좀처럼 전해지지 않다가, 마지막에 연결되어 해피엔딩"인 장르라고 정의했다. 주인공들의 말싸움 속에는 '대화'가 내재되어 있고, 대화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다. 우연이 반복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서로가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과정을 통해 남녀 주인공은 서로를 이해해가고,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어간다.

대화를 잘 이용한 영화로는 <비포 선라이즈>가 있다. 사랑과 실연, 결혼, 인생, 인간관계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줄리 델피 분)의 대화는 영화 전반을 수놓는다. 관객은 기꺼이 두 주인공으로 몰입한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서로의 제시와 셀린을 기다린다. 이 영화가 20년 간 지속적으로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두 사람의 대화가 관객에게도 함께 쌓여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관객과 주인공들의 유대는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졌다.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날의 분위기> 속 재현은 수정에게 오늘 밤을 같이 보내야 할 이유를 설득하지 않는다. 재현의 행동은 진철의 행방을 담보 삼은 협박 행위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잘 빠진' 화면과 배우 덕에 협박은 무디게 다가온다. 영화는 한강과 여의도, 기차역과 KTX를 아기자기하게 담아냈다. 배우들은 캐릭터에 자신들의 매력을 덧씌워 적절하게 연기한다. 문채원은 빈틈이 있지만 귀여운 캐릭터를 맡아 사랑스럽게 소화해냈다. 누구나 반하는 유능한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유연석'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변했다. 몇몇 사람들은 성역할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만약 영화에 죄가 있다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사회 통념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밖에 없다. 마냥 즐기지 못하고 불편함을 토로하는 관객들이 생겼다. '섹스'를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발칙함'을 내세우기에도 세상은 변했다. <그날의 분위기>를 둘러싼 논쟁은 관객들이 손놓고 영화를 보지 않음을 증명한다. 안일하게 계산된 영화의 성공은 터널 저편으로 사라져버린지 오래됐음만 확인했다.

그날의분위기 유연석 문채원 비포선라이즈 로맨틱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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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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