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한·일전, 짜릿한 승리

운명의 한·일전, 짜릿한 승리 ⓒ 국제배구연맹(FIVB)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인다.

한국 여자배구가 리우 올림픽 본선 진출권이 걸린 세계 예선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8개 국가가 4장의 올림픽 본선 티켓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19일 현재 3승 1패로 이탈리아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이다.

이제 남은 경기는 3경기. 20일 페루, 21일 태국, 22일 도미니카를 차례로 상대한다. 각 팀의 경기력과 분위기 등을 감안할 때, 한국이 3전 전승 또는 2승 1패 정도는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다. 아직 본선 티켓이 확정된 것이 아닌 데다, 어떤 경우의 수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올림픽 예선전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의외의 결과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 전반기에 다소 부진했더라도 경기를 거듭하면서 짜임새가 갖춰지면, 강팀을 꺾을 수 있는 복병들도 많다.

그러나 한국 여자배구가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많은 전문가와 배구팬들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당초 한국은 4위 안에 들어 본선 티켓을 획득하는 게 지상 목표였다. 4위만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2위까지 넘보는 상황이다.

최강 전력으로 손꼽혔던 네델란드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완파하며 파란을 일으켰고, 세계 랭킹 5위이자 홈 팀 일본까지 3-1로 쾌승을 거두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국민들에게 시원함과 감동을 안겨주었고, 여자배구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일본 방송사의 경우 한·일전이 벌어진 지난 17일 인기 아이돌 그룹, 여자배구 선수 등 스타들을 총동원했다. 경기 중간중간 스타들의 관전평을 내보내는 등 1만여 명의 관중과 함께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다. 흡사 예능 프로그램을 방불케 했다. 이날 경기의 TV 시청률이 13.5%를 기록할 정도로 일본 국민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러나 한국 여자배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끌어냈다. 반면, 일본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여자배구만큼은 세계적 강팀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한국에 절대적 우세를 보여왔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의 여파 때문인지 일본은 18일 태국과 경기에서도 패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주심이 5세트에서 태국에게 준 연속된 레드카드 판정으로 2점을 거저 얻으면서 가까스로 막판 뒤집기 역전승을 거두었다. 태국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일본 선수들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간절함이 베인 눈물을 흘렸다.

토털 배구와 강서브, 김연경도 춤추게 하다

한국 여자배구에게 이번 세계 예선전이 특별한 의미를 있는 건, 겉으로 드러난 성적만은 아니다. 더 값진 수확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토털 배구와 장신화'다.

여자배구의 미래를 위해 필요했던 두 과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한국은 강호 네덜란드와 일본을 연파하는 과정에서 주 공격수인 김연경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전 포지션의 선수가 고른 활약을 펼치면서 토털 배구에 가까운 모습을 선보였다.

특히 김연경과 짝을 이루는 레프트 박정아와 라이트 김희진이 자기 포지션에 걸맞은 득점을 해준 것이 컸다. 양효진, 김수지의 센터진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이효희 세터의 안정감 있고 다양한 볼 배분도 탁월했다. 리베로 김해란은 수비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교체 멤버로 들어간 이재영, 이소영, 강소휘도 알토란 같은 활약으로 분위기 반전에 크게 기여했다. 카자흐스탄과 경기에서는 출장 기회가 적었던 황연주, 배유나, 염혜선, 남지연까지 나서 3-0 완승을 끌어냈다.

동료들의 고른 지원을 받은 김연경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세계 최고 공격수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연경은 현재 득점 랭킹 2위, 서브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수가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안겨준 것이다.

또한 전 선수가 서브를 강하고 까다롭게 구사했다. 한국은 이번 세계 예선전에 출전한 8개 팀 중 가장 위력적인 서브 능력을 보였다. 이는 토털 배구나 스피드 배구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19일 현재 서브 부문에서 김희진이 전체 1위, 김연경이 3위, 김수지가 5위를 달리고 있다. 대표팀의 막내인 19살의 강소휘마저 빠르고 낮게 깔려 들어가는 강서브로 중요한 순간마다 역전과 반전을 이끌어냈다. 일본 등 한국에 패한 감독들도 "한국의 강서브를 막지 못한 것이 패인"이라고 실토할 정도다.

여자배구 대표팀 14명 모두가 제 역할을 해내고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원팀'이 되면서 토털 배구의 위력은 배가되고 있다. 팀플레이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고, 조직력도 한층 안정감이 생겼다.

한국 주전 평균신장 188cm... 유럽 강호들과 대등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한국 여자배구가 장신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한국 대표팀의 주전 평균신장이 유럽 강호들과 대등해진 것이다.

특히 박정아가 레프트로 들어가면, 한국 대표팀은 김연경(29세·192cm·레프트), 박정아(24세·187cm·레프트), 김희진(26세·185cm·라이트), 양효진(28세·190cm·센터), 김수지(30세·186cm·센터) 등 주전 공격수 5명의 평균 신장이 188cm로 껑충 뛰어올랐다.

네덜란드의 이번 대회 주전 공격수 5명의 평균 신장은 188.4cm이고, 이탈리아는 187.8cm다. 신장 면에서 똑같아진 것이다. 이재영(21세·179cm·레프트), 이소영(23세·176cm·레프트)이 들어가도 평균신장이 186cm에 달한다.

주전 평균신장이 190~193cm에 달하는 중국과 미국, 러시아를 제외하고, 이제 한국 여자배구도 '신장의 열세'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아울러 빠르기와 조직력를 더욱 강화해 토털 배구의 완성도를 높인다면,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 수 있다. 김희진, 박정아, 이재영, 이소영 등 김연경 이외의 날개 공격수들까지 공격력을 더 높이고 파이프 공격(중앙 후위 시간차 공격)을 구사하는 스피드 배구 단계까지 갈 수만 있다면, 올림픽 메달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이정철 대표팀 감독은 지난 4월 열린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매디슨 킹던(레프트·185cm)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올겨울 V리그에서는 소속 팀인 IBK기업은행을 '스피드 배구'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피드 배구를 위해서는 토털 배구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 주 공격수 한두 명에 의존하는 배구로는 스피드 배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한국 여자배구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따낸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현 대표팀 선수들의 면면과 경기력으로 볼 때, 이번 리우 올림픽이 메달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자배구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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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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