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 ⓒ 남소연


"예술가의 터치를 회화의 진품성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20세기 예술을 앞 세기들의 예술과 그토록 다르게 만들어준 개념적 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다." (David W. Galenson, Conceptual Revolutions in Twentieth-Century A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198)

조영남 사건에 관해 매일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①조영남의 대작을 미학적으로 비판하거나, ②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어도, ③그를 '사기죄'로 다스리는 것은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부당한 폭력이라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에 대해 여기저기서 반론이 나왔다. 황당한 것은, 정작 내가 그 글에서 제기한 물음, 즉 '조영남을 사기죄로 처벌하는 게 온당한가?' 하는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들 그저 조영남을 '개새끼' 만드느라 바쁘다. 그래, 그들의 말대로 조영남이 개새끼라 하자. 개새끼는 모두 기소하거나 구속해야 하는가?

황당하게도, 그들이 나를 비난하며 늘어놓는 논리란 게 내가 조영남에게서 문제 삼을 부분으로 지적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 글에서 나는 조영남에게서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을 ①작가의 터치가 느껴지지 않는 익명적·기계적 부분을 넘어서 작가의 터치가 느껴지는 부분까지 대행을 시켰으며, ②실행을 대행시키면서 그 사실을 밖으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다. 전자는 미학적 비판이며, 후자는 윤리적 비판이다. 내가 아는 한, 조영남을 비난하는 이들 중에서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논거를 제시한 이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지적한 이 근거들을 내게 들이대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내가 인정했으니 거저먹고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오산이다. 앞의 두 가지 지적을 하면서 나는 거기에도 어떤 "애매함", "모호함"이 있다고 덧붙인 바 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마저도 강제적 의무조항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 중에는 경우에 따라 개인적 터치가 들어가는 부분까지 대행시키는 이들도 있고, 또 대작을 하는 모든 작가가 그 사실을 늘 밖으로 알리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섬세한 논의가 필요하고, 그러므로 미술계 밖에서 형사재판·인민재판의 굿판을 벌일 게 아니라, 미술계 안에서 윤리적·미학적 논쟁을 시작하는 게 나의 제안이자 주장이었다. 근데 대체 왜들 난리인가?

한 마디로 이 사태가 조영남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공격-쉴드의 패싸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이 유치찬란한 시나리오를 그려 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 돈키호테 놀이를 하는 것은 대중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일부 기자, 교수, 평론가까지 이 게임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 한 개인을 멍석에 말아 집단으로 두드려 패는 놀이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나는 그런 건 나쁜 짓이라 배우며 자랐다. 물론 가정교육은 집집마다 다를 테니, 그건 내가 간섭할 일이 못 된다. 이 사건에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가?'

저작권법 위반인가?

내가 들은 조영남의 죄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수에게 실행을 대리시킨 것이 '저작권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 법에 따르면, "저작권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행을 한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항은 현대미술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앤디 워홀, 다미엔 허스트, 제프 쿤스, 타카시 무라카미 등 현대미술의 슈퍼스타들은 자신의 작품 거의 모두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물리적 실행은 조수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워홀의 실크 스크린, 허스트의 스팟 페인팅, 쿤스의 풍선 강아지의 저작권이 조수들에게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검찰이 집어든 그 조항은 아마 작가-조수의 관계가 아니라, 두 작가가 한 작품을 놓고 저작권을 다투는 경우에 관한 것일 게다. 다미엔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를 예로 들어 보자. 백금 해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원래 다른 작가의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허스트였다. 만약 두 사람이 저작권을 다툰다면, 이 경우 저작권은 아이디어를 물질적으로 실현한 허스트에게 돌아갈 게다. 하지만 조영남-송기창은 서로 저작권을 다투는 관계가 아니다. 송기창 자신이 "작품의 저작권은 조영남에게 있다"고 인정했다.

검찰에서 송기창이 '조수'가 아니라고 우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송기창을 창작자로 만들어야, 조영남에게 저작권법 위반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황당하게도 송기창씨 역시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실은 뻔히 들여다보이는 이유에서) 극구 자신이 '조수'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인가? 창작자인가? 이미 그는 자기가 저작권자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조수'여야 한다. 하지만 조수도 아니란다. 여기서 우리는 조수를 조수라 부르지 못하는 황당한 언어학적 파국을 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안 봐도 비디오다.

송기창을 '조수'라 부르면 검찰로서는 조영남에게 저작권법 위반을 적용할 수 없다. 송기창은 상황이 그보다 심각해 그 경우 '사기죄'의 공범으로 기소당할 처지로 몰리게 된다. 그래서 조수도 아니고 창작자도 아닌,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아무튼 송기창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그림을 선물로 그려줬을 뿐인데, 조영남이 그걸 내다 팔았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무슨 '선물'을 8년에 걸쳐 수 백 번이나 주고, 선물로 줬다며 왜 돈을 받으며, 제 그림에 왜 남의 브랜드(화투)를 그려 넣으며, 왜 제 그림에 자기 사인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조영남이 그 그림을 내다 판다는, 하숙집 주인도 아는 사실을 그림을 그려준 본인만 몰랐다? 이게 말이 되는가?

송기창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극구 자신이 '조수'임을 부정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공소유지를 위해 넣은 검찰의 주문으로 보인다. 또 송기창을 불기소 처분해 줘야 조영남에 대해 줄줄이 불 게 아닌가. 한편, 검찰에서는 미국 대법원 판례라는 것을 들어 송기창이 멀리 떨어져 살아 조영남이 직접 감독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황당하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알렉산더 골리즈키의 조수들은 지구 반대편인 인도에 산다. 그는 국제우편으로 조수들에게 작품의 실행을 지시한다. 아무리 검찰이 이상한 판례를 들고 와서 엉뚱한 맥락에 집어넣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이것이다.

"오늘날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회화에 손을 대지 않고, 몇몇은 그들의 작품에 손을 대는 사람들을 감독조차 하지 않는다." (David W. Galenson, Conceptual Revolutions in Twentieth-Century A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185)

검찰의 논리대로라면 "오늘날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의 '조수'들은 법적으로는 조수가 아닌 셈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내 생각에, 검찰에서 들이댄 미 대법원 판례란 것은 보나마나 두 작가가 한 작업을 놓고 제 작업이라고 다투는 경우—가령 한 사람은 상대가 조수라고 하고 그 상대는 자신이 작가 혹은 공동작가라고 하는 경우—일 것이다. 미국 대법원에서 설마 온 세계 사람이 다 아는 자국 미술계의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처음으로 화투를 그릴 생각을 한 것은 조영남이고, 화투 시리즈를 화랑과 전시회에 들여보낸 것이 조영남이고, 개별작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조영남이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넣은 것이 조영남이고, 그렇게 그려진 작품에 덧칠을 한 것이 조영남이며, 그것을 제 작품으로 인정하여 사인을 한 것이 조영남이라면, 그 작품은 700% 조영남의 '원작'(original)이다. 이것이 이른바 '개념적 혁명'을 통해 관철된 현대미술의 논리다.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취향의 자유다. 하지만 이것이 현대미술에 통용되는 원작의 기준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면, 곤란하다.

조영남의 작품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취향의 자유다. '평가적'(evaluative) 의미에서는 '미술 교육도 안 받은 가수 나부랭이가 남 시켜 그린 화투 그림 쪼가리 따위는 예술도 아니'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수 나부랭이가 남 시켜 그린 그림도 '분류적'(classificatory) 의미에서는 분명히 '예술'에 속한다. 이것이 인상파 시절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현대의 논리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인민재판으로 무효화할 수 있는 것도, 형사재판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이 '개념 혁명'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도 관련된 문제다).

이른바 사기죄에 관하여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 ⓒ 남소연


뒤샹은 그 유명한 <샘>(1917)으로 '작가의 사인으로 그 어떤 대상도 예술작품으로 변용된다'는 논리를 예술계에 관철시켰다. 그의 아이디어는 50~60년대 미국에서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팝아트 운동과 함께 일시적 '일탈'이 아니라 아예 현대미술의 '본질'을 이루는 원리로 자리 잡는다. 평가적 의미에서는 얼마든지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그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분류적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누구의 손을 거쳤든 또 몇 %를 거쳤든) 그의 '원작'(original)이다. 물리적 실행에서 조수가 담당하는 역할은 0%에서 100%까지 다양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작가가 진품으로 인정했느냐 여부다.

따라서 조영남이 고객에게 판 것은 위품이 아니라 진품이다. 위품이 있다면, 송기창씨가 조영남 몰래 200만 원에 팔았다는 두 점의 그림이다. 그 두 점은 작가인 조영남에게 진품확인(authentication)을 받지 않았으므로, 아직 작품이 아니다. 설사 두 그림이 조영남이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한 다른 그림과 물리적·화학적으로 별 차이 없어도, 아니 아무 차이가 없어도. 작가에게 진품인정을 받지 않은 이상, 그것들은 '작품'이 아니거나, 최소한 '조영남의 작품'은 아니다. 검찰에서 '사기죄'를 적용해야 했다면, 바로 여기에 적용했어야 한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송기창 대신 조영남을 기소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조영남에게 '사기죄'를 적용한 근거는 '대작의 사실을 고객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히 '사기적'(fraudulent) 요소가 있다. 나 역시 미학적·윤리적 이유에서 조수의 손을 빌렸을 경우 그 사실을 고객에게 투명하게 밝히는 윤리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윤리적' 권고일 뿐, 그게 예술가에게 부과되는 '법적' 의무인 것은 아니다. 50~60년대의 작가들은 실행을 남에게 대행시키는 것 자체가 작품의 콘셉트의 일부였기에 그 사실을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창작의 '정상적' 방식 중의 하나가 되었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늘날 대행의 사실을 알리느냐 안 알리느냐를 놓고 미술계에 공유되는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까지 작가 개인의 정책(policy)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대개 알린다'는 말이 '모두 알린다'는 뜻은 아니고, 또 '반드시 알린다'는 뜻도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정책은 작가마다 다양하다. 저명작가들의 조수로 일하는 작가들의 전시회('Behind the Curtain')를 기획한 어느 큐레이터의 말이다.

"조수를 사용하는 많은 작가들은 작업과정을 투명하게 밝힌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수가 그들 작품의 대부분(때로는 전부)을 대행한다는 사실에 대답을 피하거나, 심지어 감추기도 한다."
(http://thewildmagazine.com/blog/exhibit-exposes-the-artists-behind-the-artists/)

한 마디로, 이 문제에 관련한 작가들의 정책은 사실을 명확히 밝히거나, 애매하게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의 입장을 취하거나, 아예 은밀히 감추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대작의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고 미국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거나, 작가들을 기소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다음은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 동일한 콘셉트로 개최한 전시회(Private Life: Disclosure)의 안내문이다.

"이 전시회는 자신의 경력을 발전시키면서 동시대 예술의 저명한 작가들을 위해 일해 온, 뛰어난 역량을 가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보여준다. 그 저명한 작가들에는 다미엔 허스트, 사이먼 패터슨, 라킵 쇼, 키스 타이슨, 그리고 비밀유지 서약 때문에 우리가 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다른 작가들이 포함된다."
(https://www.facebook.com/events/657964787595678/)

작가들이 조수를 고용할 때 비밀유지(confidentiality)를 요구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영국 검찰이 그 작가들을 '사기죄'로 적발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을 일종의 영업비밀로 묵인해 주는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조수의 사용을 공개한 작가들도 작업장 내에서 자신이 얼마나 물리적 실행에 관여하는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이 전 과정을 감독한다고 주장하나, 조수들의 말은 이와 달라, 몇 달 동안 일하며 두 세 번 본 게 고작이라고 한다.

갤러리의 정책도 다양하다. 작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을 아예 안 받는 곳도 있고, 대행한 작품을 받고 그 사실을 고객에게 안 알리는 곳도 있고, 굳이 알리지 않으나 고객이 물을 경우에 한해 확인해 주는 곳도 있다. 그 작품이 작가의 인증을 받은 '진품'인 이상, 누구의 손을 거쳤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컬렉터들의 대다수는 당연히 작가의 손을 직접 거친 작품을 선호하나, 작가의 서명만 있으면 되지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이도 많다. 따라서 작품을 살 때 대행 여부를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묻지 않는 사람도 있다.

조영남이 작업을 대행시키고도 마치 자기가 직접 그린 것처럼 말했다면,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의 행위에 '사기죄'를 적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평가적 의미에서는 그를 얼마든지 '사기꾼'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분류적 의미에서 그에게 '사기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자 법의 남용이다. 검찰에서 '사기죄'로 엮는 데에 동원한 또 다른 논리는 조영남이 마치 자기가 그린 것처럼 거짓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외국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실망은 대부분 영웅적 성취의 아우라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작가들이 확산시키거나, 혹은 최소한 수정하지 않은 채 내버려둔 그릇된 기대감에서 비롯된다."

정확히 조영남에 해당하는 경우다. 이처럼 작가들은 때로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고 검찰에서 잡아가지는 않는다. 심지어 워홀도 과거에 '작품을 대행시킨다'고 한 것은 농담이었으며, 실은 자신이 작품을 직접 제작했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기죄'로 기소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예술계'라 불리는 세계의 고유한 특성이다.

범죄(?)의 재구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건이 불거진 경위다. 처음에는 송기창 작가가 조영남을 고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의 매일신문 기고도 그 전제 위에서 썼다. 하지만 그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송기창씨는 조영남을 고소한 게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 주인이라고 밝혔다. 왜 이런 기초적 사실을 놓고 혼선이 생겼을까? 기자들은 검찰이 흘리는 내용을 받아 적었고, 그 과정에서 슬쩍 검찰의 의도가 미리 드러났기 때문일 게다. 즉, 검찰에서는 송기창을 조수 아닌 '창작자'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조영남을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게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순전히 추측일 뿐이다.

집주인이 고발을 했다는 얘기도 생뚱맞다. 보통 사기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고발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조영남에게 작품을 산 이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와 상관없는 셋집주인이 고소를 했다. 왜?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어쩌면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 어느 기사에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따르면, 송기창씨가 지인에게 200만 원을 꾸었다가 갚지 못하게 되자, 허락도 없이 제 그림 한 점을 조영남 원작으로 속여서 주고 나서, '값이 오를 테니 하나 더 구입하라'며 말하며 또 다른 그림을 200만 원에 팔았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말하는 '지인'이 조영남을 고소한 하숙집 주인이라면, 상황이 이해가 된다. 물론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내가 여기서 느닷없이 '추측'을 늘어놓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사건의 보도를 들으면, 당장 떠오르는 것이 위의 두 가지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소해 주는 것이 기자들의 일이다. 그런데 이 나라 기자들은, 발로 뛴 몇몇을 제외하면, 하라는 취재는 안 하고 검찰이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적기에 바빴다. 기사는 그걸로 퉁치고, 대신 조영남을 성토하는 도덕적 칼럼들을 썼다. 이게 정상인가? 기자가 미학을 하니, 미학자가 취재를 해야 할 텐데, 내가 취재를 다닐 형편은 못 되니, 추측을 동원해서라도 사건을 재구성해 볼 수밖에 없잖은가. 이쯤 해두고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자.

송기창씨가 조영남의 허락 없이 남에게 그림을 팔았다는 보도가 사실이라 하자. 이 경우 그림을 구입한 이가 먼저 작가에게 연락해 진품여부를 묻는 게 정상이다. 그러면 작가가 진품인지 위품인지 확인해 구입한 이에게 알려주고, 그 그림이 본인이 허락한 게 아니면, 서명을 위조한 이에게 조치를 취하게 된다. 고소를 할지 말지는 작가의 권한이다. 그가 고소를 하면, 그때 경찰과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다. 한편, 속아서 작품을 산 이는 대금의 반환을 요구하고, 거부당하면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된다. 이게 정상적 절차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고소인은 '대작'이라는 사실 자체에 너무 놀라 두 사람을 사기죄로 고소한 것 같다. 그러자 검찰에서 엉뚱하게 조영남을 타깃으로 정했다. 검찰이라고 현대미술을 더 잘 아는 것은 아닌데다가, 이왕 잡을 것이라면 무명화가보다는 유명인을 잡는 게 여러 모로 경제적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가능성 외에는, 서명을 위조한 이가 증인이 되고, 위조를 당한 이가 피고가 된 이 전도된 사태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소장을 보았다면 검찰의 논리를 세세히 반박하겠지만, 아직 소장을 보지 못한 상태라, 그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정보들에 기초해 이 정도 얘기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검찰이 저지른 범주오류 

 갤러리 U.H.M 문 앞에 조영남 전시회 취소 안내문이 붙어있다.

갤러리 U.H.M 문 앞에 조영남 전시회 취소 안내문이 붙어있다. ⓒ 김윤정


다시 강조하자면, '조영남을 기소해도 되는가?' 이것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다. 내가 보기에 검찰이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 축구경기장에 들어와 태클로 상대를 다치게 한 선수를 '과실치상', 혹은 고의성이 있다고 '폭행치상'으로 기소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금 검찰이 하는 일은 그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도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이 있듯이, 예술에도 법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검찰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는데, 다들 이 심각한 문제를 아예 문제로 인식조차 못 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검찰에서는 조영남을 사기죄로 기소하면서 피해액을 "1억8천 만 원"으로 상정했다. 웃기는 얘기다. 고객들이 조영남에게 산 작품들은 위작이 아니다. 그가 대작의 사실을 고지했든 안 했든, 모두 작가에게서 진품인정을 받은 '원작'(original)이다. 검찰에서 산정해야 할 피해액이 있다면, 400만 원이다. 송기창이 조영남의 허락 없이 지인에게 넘겨줬다는 두 점의 그림. 그 두 그림은 조영남의 위작이다. 그게 현대미술의 규칙이자, 르네상스 이후에서 19세기 이전까지 적용됐던 고전예술의 규칙이기도 하다. 과거에 작가가 모든 것을 그려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계약 자체를 그렇게 했다. 물론 그 경우 작가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높은 값을 요구했다.

생각해 보라. 조영남의 작품이 사기라는 범죄에 사용된 물품이라면, 마땅히 압수해서 소각해야 할 것이다. "1억8천 만 원"어치라니 아마 폐기해야 할 작품이 십 수 점에서 수십 점 사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헬조선에서만 인정받지 못한 현대미술의 규칙에 따르면, 조영남의 작품은 엄연히 '원작'이다. 작가가 콘셉트를 만들어 관철시키고, 그 콘셉트 실행을 지시하고, 그 산물에 덧칠을 하고 직접 사인까지 한 진품을 소각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 지점에서 법의 논리와 예술의 논리가 서로 충돌한다. 누구의 잘못일까? 잘못은 주책없이 차선 위반을 한 검찰에게 있다.

얼마 전 독일에 흥미로운 판결이 있었다. 문제가 된 작품은 호주에 있는 임멘도르프의 원작을 사진으로 찍어, 캔버스에 투사한 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복제를 한 이는 작가의 조수였다. 이 작품이 경매에 나오자 작가의 유족이 '위작'이라며, 작품을 소각시켜달라는 소송을 냈다. 작품에는 임멘도르프의 사인이 적힌 인증서가 붙어 있었다. 분석 결과 사인이 인쇄된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인증서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작가의 부인은 당시 그 인증서들이 작업실의 누구나 손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작품을 소각하라는 그녀의 요청을 기각했다. 임멘도르프가 인증서를 주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조수가 그린 모작도 진품으로 간주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작품은 임멘도르프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인증서도 임멘도르프 몰래 훔쳐낸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말년에 망가졌다 해도, 임멘도르프가 이미 그린 자신의 작품을 사진으로 베껴 그리라고 시켰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사법부는 비록 그 작품이 "미학적으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 할지라도, 작가가 그 복제에 진품인정을 했을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소각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예술계의 고유한 논리를 존중하는 독일 법원의 방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동원해, 작가로부터 인증을 받은 멀쩡한 진품을 "1억8천만 원"어치의 사기용품으로 분류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보수언론의 기자는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는 없다"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이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내가 우려하는 사태가 실은 이것이다. 모든 사안에 무차별적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검찰이 엉뚱한 데에 사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범주오류'(category mistake)를 저질렀다. 그런데 그걸 바로잡아야 할 기자가 그것도 '법이니 따르라'고 강요를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내가 얘기한 현대미술의 논리와 판례 등은 간단한 구글 검색만으로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도 팩트는 확인하지 않고, 기자들이 지면에 들어주기 민망한 개똥미학을 지린다. 독자에게 무지와 편견으로 범벅이 된 그 똥을 먹으라고는 것이다. 대중이 제주도 똥돼지냐?

이우환-천경자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현대미술에서 진품인정의 최종심급은 작가다. 도대체 작가가 위작이라는데, 왜 남들이 원작이라고 하고, 작가가 원작이라고 하는데, 왜 남들이 위작이라 하는가? 천경자 화백의 경우는 명백히 진품이라 주장하는 측에서 잘못한 거다. 이우환 화백의 경우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우라 판단하기 까다롭다. 과학적 증거는 13점이 위작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작가들도 종종 제 작품을 못 알아보거나, 남의 것을 제 것으로 오인하곤 한다. 하지만 두 개의 기준이 충돌할 경우 앞세워야 할 것은 작가의 의견이다. 나는 이우환 화백이 왜 짜증을 내는지 이해가 된다. 경찰이 작가의 허락도 없이 그의 세계에 폭력적으로 난입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의 도덕적 입방정이 시작됐다(이 나라엔 웬 놈의 군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공자가 울고 갈 판이다). 이 화백을 거짓말쟁이 만들어 놓고 솔직히 고백하라고 마구 종용한다. 두 개의 기준이 있다. 하나는 예술의 기준, 또 하나는 과학의 기준이다. 이 둘이 부딪힐 때, 우선권은 작가에게 돌아간다. 과학은 작가가 요청을 하거나, 아니면 작가가 생존하지 않을 때 소환되는 것이다. 피카소는 "위작이라도 훌륭한 위작이라면 사인을 하겠다"고 했고, 장 코로는 모작자를 기리기 위해 위작에까지 사인을 했다. 워홀 역시 위작에 사인을 해준 적 있다. 모작이라도 작가가 사인을 했다면 진품이다. 이해가 안 돼도, 이것이 예술의 논리이고 규칙이다.

지금 이 사회가 마구 짓밟는 것이 바로 이 예술 고유의 영토다. 과학이 위작이라는데 진품이라 우기는 거장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되면, 이렇게 생각해 보라. 이번 '코파' 대회에서 페루의 공격수가 골을 넣었다. 브라질 팀이 항의하자, 주심은 선심과 상의한 후 골을 선언했다. 하지만 카메라로 확인해 본 결과, 핸드볼 파울로 드러났다. 한 마디로, 과학과 축구가 충돌한 것이다. 이때 어떻게 하는가? 비록 오류가 있더라도 우리는 심판의 판정을 존중한다. 그 골도 골로 인정해주는 게 축구다. 누구도 이 관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왜 예술에서만은 이러한 고유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걸까?

나는 '인간' 조영남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니 그를 욕하더라도 내 이름은 망령되이 일컫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도 욕을 해야겠다면, 내 물음에 답변이나 한 후에 하기 바란다. '조영남을 기소해야 하는가?' '이게 검찰에 맡길 문제인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 달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했고, 이제 손가락으로 넘어가 보자. 내 손가락을 겨냥한 그들의 논리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실은 검찰의 기소 논리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를 따지는 것은 성격상 미학적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덧붙이는 글 이제까지 나는 현대미술의 상황과 논리를 내가 아는 대로 기술했다. 미학을 30년 넘게 공부하며 <서양미술사 1,2,3>을 쓰고, <현대미학강의>를 쓴 자의 말도 못 믿겠다면, 처음에 인용한 외국저자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 책 9장 의 원고를 운 좋게 인터넷에서 찾았다.

http://www.nber.org/papers/w12714.pdf 특히 기자들은 꼭 읽어보시라. 팩트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팩트를 부정하면 논쟁이 불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 '조영남 공격 or 쉴드'의 게임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수염난 어린이들에게 한 마디. 실망스럽겠지만, 나는 조영남과 일면식도 없다. 이 나라에 사는 거, 피곤하다. 괜히 헬조선이 아닌 모양이다.
조영남 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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