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많은 필자들이 분석했듯, 영화 <부산행>은 한국 사회의 각종 적폐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이뤄져있다. 특정 사건 하나를 보여주고자 했다기보다는 누군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으레 떠올릴 수 있는 여러 부조리들을 빗대어 보여줬다.

열다섯 칸 열차에 '헬조선'을 응축한 영화 <부산행>은 '갑'은 뒤에 두고 '을'끼리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과, 누군가를 배제해 비정상의 정상적 공동체를 만든 뒤 파멸하는 모습 등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담아낸 점은 박수 받을 만 하지만, 젠더 감수성 문제가 못내 아쉽다. 많은 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연 감독도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연 감독의 의견이 제일 동의하기 어렵다.

좀비와 승객의 대결구도, 사실은 '을'과 '을'의 싸움

 감염된 좀비도 '을'이었고 좀비와 싸우는 승객들도 '을'이었다.

감염된 좀비도 '을'이었고 좀비와 싸우는 승객들도 '을'이었다. ⓒ NEW


영화 속 한국 정부는 좀비에 감염된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속출하고 있는 상황을 '무차별 폭력 시위'라 규정한다. 언론은 그 말을 그대로 보도한다. 영화는 언론 보도 장면과 열차 안에서 좀비들이 날뛰고 있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다. 한 장면 씩 교대로 보여준다는 의미다. 언론 보도 장면과 열차 내 좀비 감염 사태에 유사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편집이다.

현 정부는 시위대를 자주 폭력 집단으로 규정한다. 보수 언론사는 시위대가 거리로 나온 이유보다, 몇 천 명이 운집해 거리를 점령하고 수많은 경찰 병력과 대치하는 모습을 주로 보도한다. 시위에 관심이 없는 시민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찡그리거나 교통의 불편함을 호소한다. 인터넷 기사 댓글창엔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시위대를 지지하는 쪽과 "고생하는 경찰은 무슨 죄냐"며 시위를 반대하는 쪽이 치열하게 댓글 싸움을 벌인다. 시위대는 정부와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나왔는데 경찰 혹은 다른 시민들과 대결 구도를 만든 반어적인 상황이 된 것이다.

시위 뿐만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인양과 특별법 개정이 답보 상태다. 그러나 누구든 이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었던 '을'들은 세월호가 지겹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날 경우 '갑'은 그 뒤에서 뒷짐을 진 채 '을'끼리 싸움을 붙인다. 이런 방식으로 '갑'은 비난의 화살을 자연스레 피해가게 된다. 김훈 작가의 소설 <현의 노래>에 나오는 '피아를 모르는 눈 먼 화살'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갑'이 교묘하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덕분에 '을'들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 못하는 눈 먼 화살을 서로에게 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는 정부인 '갑'이 뒤에서 잠자코 있으면서 나라에 일어나는 난리를 '폭동', '폭력'이라 규정하는 사이 현장에서는 결국 '을'과 '을'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정확히 묘사한다. 열차 내 좀비 감염 사태도 마찬가지다. 좀비들은 민간인을 해치고는 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죄가 없다. 그들이 좀비가 된 이유는 한 바이오 회사의 부도덕함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졌고, 정부가 이를 통제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달의 원인은 '갑'에게 있는데 좀비와 민간인이라는 애먼 '을'끼리 싸우는 형국이 된 것이다.

부산행 열차로 들어온 최초 감염자 가출소녀(심은경 분)는 감염된 채 열차로 뛰어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진짜 잘못한 사람은 '을'들의 뒤에 군림한 '갑'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잘못한 사람으로 비난하고 물어뜯는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이런 참혹한 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에 대하여

 용석은 자신의 정상성을 획득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감염자로 지목해야만 했다.

용석은 자신의 정상성을 획득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감염자로 지목해야만 했다. ⓒ NEW


열차 15번 칸은 감염자가 존재하지 않는, 즉 생존자만 존재하는 청정구역이다. 일방향으로만 몰려오는 좀비를 피해 생존자들이 도피한 마지막 공간이다. 이곳에 주인공 무리들이 좀비를 물리치고 극적으로 도착한다. 그러나 생존자 칸에 있던 용석(김의성 분)은 이제 막 도착한 주인공 무리에게 "이 사람 감염됐어!" 라며 나갈 것을 요구한다. 다른 생존자들도 용석의 의견에 강하게 동의한다. 주인공 무리들은 결국 15번 칸 바깥 복도로 쫓겨나게 된다. 생존자들끼리 힘을 합해 연대해도 모자랄 시간에, 15번 칸 사람들은 극한의 죽음을 뚫고 어렵게 살아온 이들을 바깥으로 내보낸다.

용석이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효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석은 천리마 고속 사장으로, 부산까지 가는 최단 시간 경로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자기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했던 인물이다. 이런 그에게 생존자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자신이 안전하게 부산에 도착할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 감염됐어!"라는 말은 왜 그렇게 급하게 내뱉은 것일까. 감염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용석에게는 사실 좀비가 필요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멀쩡한 어떤 이를 좀비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비정상으로 규정해야 자기 자신은 정상성을 획득하고 기존 15번 칸에 있던 생존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배제하는 원리가 이와 비슷하다. 다른 이를 비정상으로 규정해 공동체에서 제거함으로써 자신은 상대적으로 높은 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드 배치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을 종북 빨갱이로 모는 사람들이 그랬고, 사건 사고 때마다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고 남탓부터 하는 권력자들이 그랬다. 그렇게 한 두 명씩 비정상으로 규정한 후 공동체 밖으로 몰아내고 나면 남은 건 비정상의 정상적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 참고로 15번 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젠더 감수성 문제, 연 감독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연 감독은 여성 인물만 생존시킨 것을 두고 '여성 중심 세대를 여는 것'이라 해석했지만, 정작 성경과 수안은 영화에서 살아남은 것 말고 한 게 없다.

연 감독은 여성 인물만 생존시킨 것을 두고 '여성 중심 세대를 여는 것'이라 해석했지만, 정작 성경과 수안은 영화에서 살아남은 것 말고 한 게 없다. ⓒ NEW


많은 필자들이 이 영화의 젠더 감수성 문제에 대해 지적해왔다. 남성을 구원자로 설정해 여성은 그 남성의 보호를 받는 인물로 묘사한 것, 상화(마동석 분)가 아내 성경(정유미 분)의 뱃속에 든 아이를 가리키며 "이거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등 가부장적 질서가 지나치게 공고히 묘사된 것 등이 대표적이다.

혹자는 이런 국가 재난 사태에서 물리적으로 힘이 센 아버지가 아내와 자녀를 지키는 것은 다분히 현실적인 설정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사람들은 '좀비가 나오는 액션 영화에서 여전사가 아닌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의미 있는 질문이지만 비판을 막지는 못한다. 의미가 있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이야 말로 이야기 만들기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듀나, <엔터미디어>,"<부산행>, 김수안이 치어리딩으로 좀비를 때려잡았다면" 중에서

영화는 가상의 이야기다. 현실을 배경으로 할 때는 리얼리티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 리얼리티를 깨지 않는 선에서는 얼마든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인용한 듀나의 글 제목처럼, 수안(김수안 분)이 하다못해 야구공을 좀비에게 던져 좀비가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장면 한 두 개 넣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듀나는 해당 글에서 또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에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자기가 속해있는 중년 아저씨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상상력의 범위를 그 영역에 제한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아저씨화가 지속되면서 결국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모든 게 지루해진다. 고개를 들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상력의 영토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이미 밑천이 다 드러난 어른 남자들은 잠시 치우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자."

듀나는 한국 영화의 '아저씨 서사'가 영화 내용을 뻔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여자들과 아이들의 서사에 눈을 돌리자고 강조한다. 새로운 이야기 발굴을 위해서도 이런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이에 더해, 가상 이야기에서라도 기울어진 젠더 지형의 추를 조금이나마 평형으로 맞추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처럼 수용자가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매체에서 조금씩 성평등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결국 사회 전체에도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필자들은 성경과 수안만 생존한 결말을 두고 "남성은 다 죽고 여성만 생존했으니 오로지 남성 중심적인 영화라고 볼 수만은 없다"고 해석하기도 하며, 또 다른 필자는 "그래도 남성 군인 품에 안겼으니 여성은 끝까지 시혜적 보호를 받은 것이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연상호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두고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연 감독의 의견이 제일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영화에서 한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가 어떻게 이어질까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세대는 남성 중심 세대라 생각해서 새로운 세대는 여성 중심이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에 그렇게 결말을 지었다." - 박은영, <무비스트>, "가족 얘긴 신파가 아니라 당위다" 중에서

여성 생존자 두 명을 남성 군인 품에 안겨놓고 '여성 중심 세대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간편한 해석이다. 그 여성 두 명이 다음 세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어떤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았는데 말이다. 또한 헬조선을 응축시킨 영화에 맞게 예측해보자면, 성경과 수안은 바이러스 검사를 받고 격리돼 온갖 차별에 시달릴지 모른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강두(송강호 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성경과 수안으로 대표되는 여성 세대가 다음 세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함의를 담고자 했으면, 결말에서 그들에게 어떤 주체적인 역할을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수안은 무서워하는 성경을 위해 크게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좀비가 아니라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불렀다는 해석도 있으나 이는 수안의 의도가 아니다. 남성 군인이 그렇게 알아본 것이다. 성경과 수안은 연 감독이 이야기한 '여성 중심 세대'를 위해 결국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은유하는 작품과 남성 중심의 영화는 많았다. 영화 <부산행>은 은유는 첨예하게 했지만 '아저씨화'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재난 시 여성을 보호하는 가장의 서사, 이제 그만 볼 때도 됐다. 헌데 이것이 오로지 <부산행>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한국 영화계가 안고 풀어가야 할 숙제다.

영화 부산행 공유 정유미 마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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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산책을 좋아합니다. 준이, 그리, 도비와 삽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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