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심>에서 변호사 준영 역을 맡은 배우 정우.

"변호사 준영은 속물적인 사람이다. 그가 단번에 변하는 게 아닌 그 소년을 의심하다가 서서히 마음을 여는 과정이 좋았다." 정우가 말한 영화 <재심>의 매력이다. ⓒ 호호호비치


가난하고 비루한 자신의 인생을 뒤집을 한 방을 노리던 변호사 준영(정우 분)은 영화 말미에 성인이 된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재판 뒤집기가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동기 자체는 불순했다. 검경의 횡포와 사법부의 안일함으로 10년을 복역하고 나온 소년의 억울함을 풀고 자신은 크게 유명해지겠다는 속셈이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검경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한다. 친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마저 등 돌린다. 준영은 억울한 소년을 스스로 의심하다가도 믿음 주기를 반복한다. 영화 <재심>의 내용이다.

"마음과 마음의 소통과 울림이 있는 영화" 배우 정우는 그렇게 <재심>을 정의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소재로 극화한 이 영화를 그는 "준영을 통해 소시민을 성찰하는 작품"으로 이해했다. 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선 결정, 후 파악 

사실 시나리오를 읽은 직후에도 정우는 이 영화가 실제 사건을 극화한 걸 몰랐다. "물론 몇 시간 뒤 얘길 들어 알게 됐는데 그 전과 그 후의 마음가짐이 남달랐다"고 고백했다. 그는 "굉장한 사건이었고, 무서운 일이었지만,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처음부터 관객분들이 지치지 않게 이야기에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 배경을 전했다. <재심>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고 다소 경쾌하게 시작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간 변호사 캐릭터는 여러 영화에 나왔기에 다르게 표현한다고 나름 신경 쓰긴 했다. 여전히 걱정 반 두려움 반이다. 무엇보다 내가 표현하는 변호사 준영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살려는 속물적 근성이 있는 사람이 변하는 과정을 표현하려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는 하나의 옷일 뿐이지."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준영(정우 분)과 현우(강하늘 분)이 서로를 불신하다가 신뢰하기를 반복한다. ⓒ 오퍼스픽쳐스


어떤 특정 사건에 대한 공분을 일으키기보다, 정우가 집중했던 건 사람에 대한 이해이자 성찰이었다. 그래서 극적인 변화 지점을 일부러 강조하지 않으려 했다. 정우는 "겉으로 보기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걸로 보이지만 진짜는 상처를 가진 한 사람을 올곧이 이해하고 믿는 과정"이라 밝혔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변호하는 거잖나.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준영은 끊임없이 현우를 의심하고 돌아간다. 그 지점이 어려웠다. 실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님을 촬영 전에 뵙고픈 생각이 있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마지막 촬영 때 뵙게 됐다. 실제로도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예리한 분이더라(웃음)."

연기의 동력

이번 현장에서 정우는 그렇게 재촬영을 많이 요구했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도 여러 설정을 덧대거나 바꿔보길 주저하지 않았다. 주연 배우로서 일종의 책임감일 수도 있겠다.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가 운을 뗐다.

"함께 했던 선배들이 그랬다. <히말라야>도 <쎄시봉>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작품의 예산도 그렇고 주변 환경이 그렇게 여유로운 편이 아니라 자칫 쉽게 타협해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러기 싫었다. 다른 방식으로 채워나갈 걸 고민하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냈지. 감독님으로 하여금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실 수 있게. 근데… 잘한 선택인진 모르겠다(웃음)."

돌아보면 정우는 이렇게 자신을 다그치며 조금씩 자가 발전해왔다. 벌써 17년 차, 단역에서 조연으로, 조연에서 비중 있는 주·조연으로 넘어가며 그는 동료들에게 현장에서 하나씩 배워왔다. 매 작품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순 없다. 정우는 그 아쉬움을 예민하게 잡아내 다음 작품을 위한 연료로 태우는 배우였다. 이 대목에서 그는 영화의 첫 주연작 <바람>을 언급했다.

"원톱, 투톱 이런 말이 좀 의미가 없는 거 같다. <바람>(2009)을 할 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했다. 물론 거대 예산이 들어가는 상업영화를 하면서 일종의 책임감은 생각 안 할 수 없더라. 마음가짐을 좀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떤 작품은 허투루 했다는 건 아니고, 계속 반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성하는 저 자신을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지 않는 순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단역을 오래 하다 보면 쌓이는 감정이 있다. 긍정의 감정과 부정의 기운 둘 다 있다. 작은 걸 보고 큰 그림은 못 보곤 했다. 물론 지혜가 있는 분들은 비중을 떠나 작품 전체를 보신다. 그런 분들이 많지만 난 부족했다. 작품마다 그걸 느낀다. 조금씩 채워나간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많이 비어있는 날 보고 힘들어하기도 했지. 자신이 못나 보인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영화 <재심>에서 변호사 준영 역을 맡은 배우 정우.

ⓒ 호호호비치



잠깐의 쉼

'이야기에 공감하고, 캐릭터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때'. 배우 정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중 하나다. <재심>에 이어 군사 비리를 소재로 한 <제5열>도 "이야기 자체가 끌렸고, 좋은 의미까지 갖는 작품"이었기에 택했다. 정우는 "1년 정도 쉬면서 너무 오래 공백을 가졌나 생각할 즈음 택한 거라 정말 치열하게 했어야 했다"며 선택하는 순간의 감정을 복기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17년이다. 처음부터 비중이 컸던 게 아닌 맨몸으로 부딪히며, 걸어왔다. 마치 하나씩 돌이 단단히 올라간 석탑처럼 말이다. 그의 연기 동력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잠깐의 생각 후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처음엔 그냥 작품이 하고 싶었다. 연기하고팠지. 근데 아는 통로가 없었다. 드라마를 하고 싶었지만, 소속사가 없었고, 연극이 하고 싶었지만, 대학로 아무 극단에 가서 무대포로 들이댈 용기가 없었다. 영화 잡지 맨 뒤에 실린 오디션 정보를 보면서 조금씩 시작한 거다. 그러다 역할이 커졌고, 어느새 이게 내 직업이 돼 있더라.

이젠 뒷걸음질 칠 수 없는 상황이다. 10년 이상 했는데 다른 걸 생각할 수 없다. 뭐, 배우뿐만 아니라 어떤 직업이든 그렇지 않을까. 그래도 연기가 내 꿈이라는 게 중요하지. 사실 그 전까진 내가 과대평가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서른 이후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잘! 찾아가야지."

보다 더 솔직해지고 겸허해진 걸까. 정우는 "삶의 가치관이 사랑하는 사람 위주로 바뀌는 게 있다"며 결혼 이후 생활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뭔가 두렵거나 그렇기보단 결혼 이후 앞으로가 기대된다"며 기자에게도 결혼을 살짝 권하기도 했다. 그 솔직함과 여유 또한 정우의 매력이다.

 영화 <재심>에서 변호사 준영 역을 맡은 배우 정우.

어엿한 가장이 됐다. 배우로서도 개인으로서도 행복한 변화가 그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 호호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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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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