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일본 삿포로 마코마나이 실내 빙상장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한 박세영(가운데), 이정수가 시상대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20일 일본 삿포로 마코마나이 실내 빙상장에서 열린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한 박세영(가운데), 이정수가 시상대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맏형 이정수가 주장으로서의 품격을 보였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2관왕에 빛나는 이정수는 22일 일본 홋카이도의 삿포로 마코마나이 경기장에서 열린 2017년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남자 1000m 결승에서 서이라, 신다운에 이어 세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럼에도 이정수는 한 국가가 시상대를 독차지할 수 없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3위를 하고도 동메달을 일본의 와타나베 게이타에게 양보했다.

비록 메달 하나를 추가하진 못했지만 이정수는 대표팀 후배인 서이라와 신다운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도록 희생을 자처했다. 전날 여자 500m에서 판커신이 심석희를 물고 늘어져 동료의 금메달을 만들어 준 것과는 달리 이정수는 정정당당하고 노련한 팀 플레이로 동생들의 메달을 챙겨주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남자 쇼트트랙 주장의 품격이었다.

밴쿠버 올림픽 깜짝 2관왕 후 오랜 슬럼프 끝에 대표팀 재발탁

어린 시절 누나 이화영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이정수는 쇼트트랙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두 명의 자녀에게 든든한 지원을 할 수 없게 됐고 누나가 피겨를 포기하면서 이정수는 더욱 독한 마음으로 쇼트트랙 훈련에 매진했다. 2006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정수는 2007년과 2008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2위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시니어 무대 진출 후 이호석과 성시백, 곽윤기처럼 비슷한 또래의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이정수는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2위에 올라 개인전 출전 티켓을 따냈다. 그리고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1500m와 100m를 싹쓸이하며 대회 2관왕에 올랐다. 김기훈->채지훈->김동성->안현수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제왕 자리를 이정수가 물려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정수는 앞 세대의 김동성과 안현수는 물론이고 또래의 이호석이나 성시백보다도 저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올림픽에서도 앞 서 있던 선수들의 충돌이나 한국 선수들끼리의 순위싸움 덕에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따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물론 전 세계 모든 운동 선수들의 최대 목표인 올림픽 금메달을 운으로 2개나 땄다는 주장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이정수가 더 깊은 슬럼프에 빠진 것은 토리노 올림픽의 영웅 안현수를 졸지에 러시아인 빅토르 안으로 만들어 버린 쇼트트랙의 파벌 논란이었다. 파벌에 연루된 이정수는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3년의 자격 정지를 받았다. 물론 징계기간은 곧 6개월로 줄어들긴 했지만 이정수는 이 징계로 인해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2011년 동계아시안게임에도 나가지 못했다. 이정수는 이후 소치 올림픽 선발전까지 탈락하는 긴 슬럼프에 빠졌다.

2014년 3년 만에 국가대표에 복귀한 이정수는 대표팀 에이스 자리를 박세영과 서이라, 신다운 같은 후배 선수들에게 내줬다. 더불어 남자 쇼트트랙도 심석희,최민정이라는 걸출한 에이스가 등장한 여자 쇼트트랙에 비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꾸준히 기량을 올려가던 이정수는 2016-2017 쇼트트랙 월드컵 4차대회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건재를 과시했고 이번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남자쇼트트랙 선수단의 주장으로 출전했다.

후배들을 위한 이정수의 노련하고 정정당당한 속도조절

이정수는 20일 자신의 주종목이라 할 수 있는 1500m 경기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냈다. 우승을 목표로 했기에 만족스런 결과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표팀 후배 박세영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에 그나마 아쉬움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여자 500m 결승 경기에서 이정수는 중국 판커쉰의 황당한 반칙을 목격했다. 비록 여자부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쇼트트랙 선수단의 맏형으로서 이정수도 충분히 기분이 상할 법한 장면이었다(관련기사: 또 등장한 중국의 '악마의 손', 한국 쇼트트랙 멍들다).

사실 한국 선수들도 마음만 먹으면 준결승이나 결승무대에서 작정하고 중국 우승후보의 진로를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팀플레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22일에 열린 1000m 경기에서 꼼수 대신 정공법을 펼쳐 이날 쇼트트랙 종목에 걸려 있던 금메달 4개 중 3개를 쓸어 담았다(남자 5000m 계주는 은메달). 동료를 위한 이정수의 희생은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돋보였다.

서이라, 한티안유(중국) 등과 함께 준결승 1조에서 레이스를 펼친 이정수는 두 바퀴를 남겨두고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이대로 속도를 올리면 충분히 1위를 욕심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정수는 3위로 따라오던 서이라가 한티안유를 추월할 기세를 보이자 살짝 속도를 줄여 서이라에게 공간을 만들어주고 한티안유를 당황시켰다. 서이라는 이 틈을 타 1위까지 치고 올라왔고 서이라와 이정수는 나란히 결승에 진출했다.

이정수의 희생정신은 결승에서도 빛났다. 최대 경쟁자였던 중국 선수들이 전원 탈락하면서 남자 1000m 결승전은 사실상 한국 선수들끼리의 경쟁이었다. 하지만 이정수는 무리해서 이 경쟁에 뛰어들지 않았고 세 번째 자리에서 속도를 높여가며 인코스를 막아섰다. 일본 와타나베의 추월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한국은 서이라, 신다운, 이정수가 1,2,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올해 한국나이로 29세가 된 이정수는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하나(5000m 계주)와 동메달 하나를 목에 걸며 경쟁력을 확인한 이정수는 내년 평창에서 화려한 서른 잔치를 계획하고 있다. 평창을 향한 이정수의 도전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알 수 없지만 이정수는 이미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후배들을 위한 희생과 팀플레이로 금메달보다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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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이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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