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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여성 배우가 중심에 선 할리우드 액션 영화로는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와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이 유명하다.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 <분노의 질주>의 미셀 로드리게즈, <언더 월드>의 케이트 베킨세일,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는 다음을 계승한 액션 스타다. 2010년대 여성 액션 영화는 사뭇 다르다. <헝거 게임>의 제니퍼 로렌스, <다이버전트>의 쉐일린 우들리 같은 틴에이저 영웅이 등장했고, 슈퍼히어로 장르는 <어벤져스>의 스칼렛 요한슨, <원더 우먼>의 갤 가돗을 내놓았다. 그리고 샤를리즈 테론이 나타났다.

<몬스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샤를리즈 테론은 이전에 <이탈리안 잡> <이온 플럭스>로 액션을 보여준 바 있다. 액션으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녀가 세계적인 액션 아이콘으로 등극한 계기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다. 그녀가 맡은 '퓨리오사'는 신드롬을 일으키며 201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으로 액션 에너지를 분출한 샤를리즈 테론.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흥행 성적이 뛰어난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선택한 다음에 손잡은 이는 액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존 윅> 시리즈의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이다. 샤를리즈 테론이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에 신중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 원톱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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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믹 블론드>는 그녀가 원톱으로 뛰는 액션 영화다. 영화는 <존 윅>이 보여준 하나의 캐릭터를 따라가는 전개, 날 것 그대로의 액션, 롱테이크로 잡은 화면을 고스란히 따른다. 반면 서사의 차이는 분명하다. 게임에 가까운 전개를 했던 <존 윅>과 달리, <아토믹 블론드>는 2012년 출간한 그래픽 노블 <콜디스트 시티>를 원작으로 삼은 스파이 액션 장르다.

영화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을 무대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스파이가 전 세계 스파이 명단이 담긴 물건과 이중 스파이를 찾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국 MI6의 비밀 요원 로레인(샤를리즈 테론 분)도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 샤를리즈 테론은 로렌인을 "관객들에게 일부러 그녀가 얼마나 유능한 요원인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여성이란 것도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며 "남자와 동등한 능력을 지닌 캐릭터"라고 설명한다.

냉전을 배경으로 사라진 리스트를 쫓는 스파이들, 속고 속이는 관계를 펼치는 <아토믹 블론드>엔 존 르 카레의 정서가 느껴진다. 영화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기운을 더한 건 MI6 베를린 지부장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 분). 그는 베를린에 급파된 로레인을 돕는 파트너로 나오나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제임스 맥어보이는 "국가의 비밀을 지키는 믿음직한 스파이였다는 것과 자신만의 정치적 행보를 한다는 것 등 냉전 시대가 만들어낸 특별한 스파이"라고 퍼시벌을 부연한다.

냉전의 한복판을 누비는 로레인이 참고한 캐릭터는 <007>의 제임스 본드다. 적들과 싸우고 섹스를 하며 마티니를 마시는 007의 특징은 그대로 또는 변형되어 로레인에 이식되었다. 그러나 007의 인상이 짙다고 짝퉁이라 오해해선 곤란하다. <아토믹 블론드>는 샤를리즈 테론만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액션, 영상, 음악이란 다양한 물감을 영화 곳곳에 색칠했다.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은 <아토믹 블론드>를 통해 "새롭고 모험적인 액션 시퀀스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레이드> 등 '리얼'을 강조한 액션 영화처럼 <아토믹 블론드>도 격렬하고 과감한 액션 시퀀스를 여러 차례 리얼하게 보여준다. 로레인은 건물을 뛰어내리고 코르크 마개, 호스 등 주변에 있는 물건을 활용하며 자동차 안과 바깥을 오가며 싸운다.

백미는 10여 분에 달하는 롱테이크 장면이다.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장면은 로레인이 건물에 들어가서 나갈 때까지를 쉼 없이 포착한다. 로레인이 적들과 싸우는 10여 분은 살겠다는 처절함과 육체적인 피로도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는 시간이다. <올드보이>의 장도리 장면,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교회 장면, <이스턴 프라미스>의 목욕탕 장면에 필적할 정도로 놀라운 시퀀스다.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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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내면을 대변하듯 화면은 블루와 메탈그레이로 물들었다. 또한, 블루, 그린, 레드, 옐로우 등 원색 계열의 강렬한 컬러를 사용해 캐릭터의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클럽의 조명은 도시의 펑크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1980년대의 도시 분위기는 독특하게 재현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타일러 베이츠 음악 감독은 여러 음악을 선곡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그 시절로 이끈다. "음악은 우리 영화의 DNA"라는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의 이야기처럼 <아토믹 블론드>의 OST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인물의 심리와 영화 속 상황을 표현한다. 이런 화법은 최근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아토믹 블론드>를 액션으로 평가하면 '아토믹 본'의 성과를 일구었다. 이야기로 본다면 '팅커 블론드'에 이르렀는지 의문이다. 인물과 사건은 배배 꼬였으나 냉전은 잘 느껴지질 않는다. 미국의 한 평자가 내린 "액션은 최고이나 좋은 스파이 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음모는 가볍다"란 평가는 영화의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었다.

흥미로운 점은 몇몇 장면에서 감독의 야심이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TV에선 샘플링 음악은 예술인가, 표절인가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극장에선 스크린에 영사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들>을 배경으로 싸우다가 화면을 찢어버리기도 한다. 이 장면들은 007을 샘플링한 인물과 액션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감독이 드러낸 영화적 항변은 아닐까?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의 선언적인 태도를 접하며 그를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의 다음 여정은 <데드풀 2>. 그가 데드풀의 구강 액션에 손과 발의 어떤 움직임을 더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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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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