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중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저 사람은 빨갱이다."

이 한마디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던 시대가 있었다. 죄 없던 사람도 '사형수'가 되었고, 정부의 잘못도 잘못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던 시대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 하의 사법부는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조봉암에게 '국가변란'과 '간첩혐의'를 씌웠고, 결국 조봉암은 1959년 사형 당한다. 이 사건과 함께 조봉암의 진보당도 와해되는 수순을 밟는다. 이렇게 한국에서 '진보'의 싹은 잘려나가고, 한국의 정치지형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리고 52년 뒤인 2011년, 사법부는 재심에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정희 시대,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꾀했던 박정희 정권은 국회 개헌정족수 확보가 절실했고, 그들은 1967년 6월 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갖가지 부정을 저지른다.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지는 국면에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고 부정선거 규탄여론은 잠잠해진다. 39년 뒤인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막기 위해  확대·과장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했다. 부정선거의 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시도가 성공한 것이다.

한국사회 발전의 걸림돌, '빨갱이 손가락질'

'저 사람은 빨갱이다'라고 가리키는 그 무시무시한 손가락질은,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생산적이고 건전한 논쟁이 설 공간을 빼앗아버렸다. 정적(政敵)의 '논리'를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 그 자체'를 빨간색으로 덧칠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한국정치의 논쟁은 누군가의 '메시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신저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주가 되고 말았다.

또 그 손가락질은, 정부의 잘못을 밝히려는 시도도 허락하지 않았다. '국가를 전복하려는 수많은 간첩의 암약' 앞에, '한가하게' 정부의 잘못이나 비판하는 행위 따위가 허락될 리 없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강철비> 속 두 철우의 대사는 불편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분단국가의 국민은 분단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 NEW


<강철비>에서는 '남북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은 한국 내에서, 북한은 북한 내에서,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과 이들에 맞서는 자들이 각각 대립한다. 한국에서는, 북한의 선전포고를 '기회'로 간주하여 '북폭'을 감행하려는 현직 대통령과 이에 반대하는 차기 대통령이 날선 논쟁을 벌인다.

남쪽 철우는 이 계획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북쪽 철우는 인민군 내 과격군부세력의 수장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양우석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변호인> 또한,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군부정권'과 이에 맞서는 송우석 변호사의 대결구도라는 점이 흥미롭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분). 북한의 선전포고를 '기회'로 간주하며 북폭을 감행하려 한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 분). 북한의 선전포고를 '기회'로 간주하며 북폭을 감행하려 한다. ⓒ NEW


그리고, 이성적-온건적 그룹은 남과 북을 뛰어넘어 협력하기도 한다. 영화 막바지, 남쪽의 철우와 북한 내각총리의 협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협상이 '남북 상호간의 핵무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쉽다. 남북간의 핵무장은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핵무장을 초래하고, 이는 동아시아의 군비경쟁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야, 두 철우의 활약에 힘입어 비극을 막아내지만, 이것이 현실에서도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남한 내에도, 북한 내에도 '분단을 이용하려는 자들'과 이에 대립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북한 타도'를 외쳐야 할 것이 아니라, 북한 내의 (영화 속 엄철우나 북한 내각총리와 같은) 이성적 그룹과는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한 내에서도 '분단을 이용하려는 세력'은 심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적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인가

북한 내에도 협력할 그룹이 있고, 남한 내에도 심판해야 할 그룹이 있다는 주장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영화 속 두 철우의 말대로, 우리는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더 고통받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적은, 그 적이 남에 있든 북에 있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브런치'라는 플랫폼에도 게시할 예정입니다.
강철비 엄철우 곽철우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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