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아이스하키는 소외당하고 외면받았던 종목이다. 특히 여자 아이스하키는 남자 아이스하키보다 훨씬 열악하다. 불모지나 다름없다. 다른 종목처럼 연봉을 받는 프로·실업 팀은 고사하고, 초·중·고·대학 팀도 없다. 오로지 국가대표팀만 존재한다. 그것도 국제대회 때마다 출전 엔트리조차 제대로 채워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은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 국제대회가 열릴 때만 소집돼 대회에 출전했다. 평창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선수들은 훈련장이 아닌 각자 생계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표팀 선수들의 사연도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만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비 유학을 떠나고,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전도 유망한 의대를 휴학하면서 국가대표 생활을 해왔다. 이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안타까움을 담은 격려를 쏟아냈다.

남북 젊은 선수들, 정치 공방 상관없이 '훈훈함 발산'

 지난 4일 남북 단일팀은 인천 선학국제빙상장에서 스웨덴과 친선 평가전을 벌였다. 당시 경기장 관객석에 한반도기가 펼쳐졌다.

지난 4일 남북 단일팀은 인천 선학국제빙상장에서 스웨덴과 친선 평가전을 벌였다. 당시 경기장 관객석에 한반도기가 펼쳐졌다. ⓒ 박진철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정부의 단일팀 결정 과정에서도 상처를 받았다. 공정성 훼손, 소통 부족 등이 사회적 이슈로 큰 논란이 되면서 심리적 부담감도 커졌다. 그럼에도 남과 북의 젊은 선수들은 정치적 이념을 떠나 스포츠 정신으로 똘똘 뭉쳤고, 첫 만남부터 훈훈하고 감동적인 행보로 그동안의 우려를 상당 부분 씻어냈다. 남북 선수들은 서로 나이를 따져 언니, 동생이라 부르며 금새 친해졌다. 식사도 처음에는 따로 했지만, 이제는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웃으며 밥을 먹고 있다.

지난 1월 28~29일에는 이틀 연속 북한의 주장 진옥과 최은경의 생일 파티를 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모습에 감동 받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이것이 바로 올림픽 정신"이라고 말했다.

8일 강릉 경포 해변 나들이에 나선 남북 선수들의 모습은 마치 오래전부터 한솥밥을 먹어 온 팀 동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려됐던 '남북 코칭스태프의 갈등'도 불거지지 않고 있다. 서로의 역할을 잘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방과 상관없이 남북 단일팀 선수단이 한민족으로서 그리고 스포츠인으로서 서로 진하게 통하는 게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머리 감독 "단일팀 우려했는데, 실제 해보니 환상적"

그런 노력의 결실이 지난 4일 스웨덴과 평가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록 경기 결과는 1-3으로 패했지만, 2~3피리어드를 무승부로 버티며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지난 1월 28일 첫 합동훈련을 시작하며 남북 선수가 손발을 맞춘 지 일주일밖에 안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 이상의 선전이었다. 실제로 평가전 이후 전문가와 언론 등으로부터 단일팀의 경기력과 조직력, 팀 분위기가 '생각보다 좋다'는 호평이 줄을 잇고 있다.

세라 머리 단일팀 감독도 평가전 직후 기자회견에서 "북한 선수들이 우리 시스템에 잘 맞추고 있다. 덕분에 좋은 경기를 했다"며 "지난해 7월 평가전에서는 압도적으로 밀린 경기를 했지만, 오늘은 괜찮았다"고 밝혔다.

7일에는 훨씬 강한 어조로 단일팀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이날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공식 훈련 직후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단일팀 분위기가 좋다"며 "처음 북한 선수들의 합류 소식을 듣고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는데, 실제로 부닥쳐보니 환상적"이라고 격찬했다.

이어 "이제 우리 선수들은 단일팀이 하나의 가족이라고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며 "다들 소통하기 위해 포옹도 하고, 손짓 발짓으로 대화한다. 그런 것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특별하다. 그들은 마치 또래의 소녀들 같다"고 흐뭇해했다. 그는 또 "북한 박철호 감독도 정말 환상적인 지도자"라며 "어떤 제안을 하든 흔쾌히 수용했다"고 치켜세웠다.

단일팀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남·북 선수와 귀화·토종 선수들의 화합과 투지, 머리 감독의 리더십,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의 전폭적 지원 등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면서 일궈낸 것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흥행... 동계올림픽 사상 '가장 이례적'

'우리는 하나다' 선전 다짐하는 단일팀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4일 인천 선학국제빙상장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스웨덴과 평가전을 가졌다. 경기에 앞서 단일팀 선수들이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다' 선전 다짐하는 단일팀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지난 4일 인천 선학국제빙상장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스웨덴과 평가전을 가졌다. 경기에 앞서 단일팀 선수들이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미 단일팀이 평창올림픽에 기여한 성과도 있다. 북한의 참가와 단일팀이 평창올림픽 흥행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언론의 취재 열기도 엄청나다. 관중 동원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아이스하키에서 남자 경기를 압도하는 티켓 판매율을 보이고 있다.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이례적인 일이다.

평가전에서도 여자 아이스하키는 만원 관중을 초과하며 3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계단과 통로에 서서 관전하는 팬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루 전날 빈 자리가 많이 보였던 남자 아이스하키 평가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열기를 뿜어냈다. 여기저기서 여자 아이스하키 표를 구하느라 '티켓 전쟁'이 벌어졌다.

북미 아이스하키리그(NHL) 선수들의 불참과 러시아 선수들의 개별적 참가 등으로 흥행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서 단일팀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 올림픽 흥행과 성공이 절실한 IOC와 개최국·개최도시 입장에서는 북한의 참가와 단일팀은 든든한 흥행 보증수표인 셈이다.

'선수들 숙원' 실업팀 창단 추진, '단일팀 효과'

국내 첫 여자 아이스하키 실업팀 창단 소식도 들려왔다. 실업팀 창단은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에겐 올림픽 메달 못지않은 숙원 사항이다. 그만큼 간절하다. 수원시는 지난 1월 23일 현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23명을 전원 영입하는 실업팀(수원시청팀)을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수원시가 현재 건설 중인 전용 아이스링크를 신생팀의 훈련장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결성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은 평창올림픽의 평화 유산"이라며 "수원시가 이런 역사적 의미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수원시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창단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분위기와 여세를 몰아 올림픽 특수성과 홈팀의 이점까지 십분 활용하면, 단일팀이 평창올림픽에서 '기적의 드라마'를 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올림픽에서는 세계랭킹도 중요하지만, 이변도 많이 일어나는 무대이다. 그럴 경우 실업팀 창단에도 큰 탄력이 붙게 된다.

설사 6강 진출에 실패해도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가 국제무대에서 한 단계 올라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 정상급 팀들과 올림픽 무대에서 내용 있는 경기를 펼친다면, 그 자체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국제경쟁력 향상에 큰 모멘텀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북미 관계에서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평창올림픽에 참가했다고 해도 한 가지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선수와 국민도 이득을 보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과 북 젊은 선수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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