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 올림픽공원의 전경

5월 19일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 올림픽공원의 전경 ⓒ 프라이빗커브(Private Curve)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던 수도권. 그러나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19일의 올림픽공원은 찬란한 초여름 햇살이 푸르게 빛났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처럼 바람은 선선했고, 햇살은 따스했다. 모처럼 쾌청한 날씨와 올해의 첫 페스티벌을 만끽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관중들, 카메라만 갖다 대도 작품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날의 첫 뮤직 페스티벌이 시작됐다. 

오후 2시쯤 도착한 메이 포레스트(88 광장)에선 그레첸 팔라토(Gretchen Parlato)의 공연이 막 시작되었다. 전설 셀로니어스 몽크가 설립한 '몽크 인스티튜트 프로그램' 최초의 보컬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그의 첫 한국 공연이었다. 평단의 극찬과 2013년 그래미 재즈 보컬 앨범 노미네이트 정도만 알고 갔던 그의 무대는 한낮의 따뜻한 햇살처럼 사근사근하고 섬세한 연주와 목소리로 마음을 녹였다. 봄날의 피크닉으로도, 재즈의 흥을 돋우고 싶은 이들에게도 모두 제격이었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메인 스테이지 메이 포레스트(May Forest)에서 공연하는 아이언 앤 와인(Iron And Wine)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메인 스테이지 메이 포레스트(May Forest)에서 공연하는 아이언 앤 와인(Iron And Wine) ⓒ 프라이빗커브(Private Curve)


이어지는 무대는 미국의 포크 싱어송라이터 아이언 앤 와인(Iron and Wine).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정겹게 인사하며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곡을 연주하겠다"라는 훈훈한 매너가 점차 따가워지는 햇살을 식혀줬다. 상냥한 어쿠스틱 구성과 정겨운 목소리가 나른한 오후의 맥주 한 잔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졌다.

잠시 발길을 돌려 찾은 핑크 애비뉴(SK 핸드볼 경기장)에선 시원한 실내 공연에 걸맞은 힙합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난해 1월 발매한 데뷔 앨범 < Yesterday's Gone >으로 영국의 머큐리 프라이즈(Mercury Prize) 올해의 앨범 부문에 노미니 된 신예 로일 카너(Loyle Carner)의 무대. 고전적 비트 위에 특유의 영국 억양으로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읊어가는 그의 퍼포먼스에 팬들은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여긴 X나 미쳤어! 내 노래를 많이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그거랑 상관없이 이런 무대는 처음이야!"라는 말에선 또 다른 '내한 덕후'를 확보한 것이 아닌가 싶어 미소를 짓기도. 초여름의 더위를 쿨(Cool)하게 달궈놓은 무대였다.

등장만으로도 압도적이었던 로린 힐, 올림픽공원 쥐고 흔들었다

 5월 19일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트레져 아일랜드(올림픽홀)에서 펼쳐진 마세오 파커의 공연 장면

5월 19일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트레져 아일랜드(올림픽홀)에서 펼쳐진 마세오 파커의 공연 장면 ⓒ 프라이빗커브(Private Curve)


이후 바삐 발길을 옮겨야 했다. 오후 5시 30분부터 스프링 가든(수변공원)에서 연주를 시작한 밴드 크루앙빈(Khruangbin)의 퍼포먼스를 놓칠 수 없었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 출신의 세 멤버들이 태국 음악의 오묘함에 빠져 밴드를 결성했다는 흥미로운 배경 스토리에 기대감이 컸는데, 나른한 해 질 녘 햇살과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기타 소리만으로도 이미 반쯤 마음을 빼앗겼다. 따가운 햇살에도 자리를 꽉 채운 관객들은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늘에서 몸을 흔들며 이국의 리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네 스테이지 중 가장 먼 곳에 위치한 트레져 아일랜드(올림픽홀)에선 2014년 자라섬을 찾았던 펑크(Funk)와 소울 재즈(Soul Jazz) 색소포니스트 마세오 파커(Maceo Parker)의 무대가 펼쳐졌다. 프린스의 '1999'로 흥을 돋우던 장내는 마세오 파커 밴드의 등장과 함께 멈추지 않는 그루브의 세계로 탈바꿈했다. 대부 제임스 브라운의 골든 히트와 열정적인 색소폰 리듬으로 빚어낸 펑크(Funk) 리듬이 잠시 잊고 있던 재즈의 그루브를 일깨웠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로린 힐(Lauryn Hill)의 차례. 올림픽공원에 운집한 2만여 관중들이 기다렸던 단 한 명이라면 단연 로린 힐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 힙합 그룹 푸지스(Fugees)로 한 획을 그음과 동시에 솔로 데뷔 앨범 <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로 세계를 휩쓴 여장부의 등장을 기다리며 팬들은 디제이의 리듬에 귀를 기울였다. 

대형 브라스 밴드의 웅장한 사운드로 등장한 로린 힐은 등장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화려한 무대와 가스펠 코러스, 기막힌 편곡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목소리 하나만으로 전율을 심었다. 불혹의 나이에도 녹슬지 않은 속사포 랩과 풍부하다 못해 넘치는 보컬의 힘, 타고난 그루브 앞에 88 잔디마당은 감탄사로 가득 찼다. 'Final hour', 'Fu gee la',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Ready or not' 등 히트곡을 쏟아낸 로린 힐의 카리스마는 올림픽공원 전체를 쥐고 흔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로린 힐(Lauryn Hill)의 무대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로린 힐(Lauryn Hill)의 무대 ⓒ 프라이빗커브(Private Curve)


<서울 재즈 페스티벌>을 '재즈 페스티벌'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가 몇 해 전부터 나왔다. 재즈라는 제목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음악 팬층의 수요를 충족하고자 하는 확장은 좋으나, 장르 특성이 옅어지면서 그저 '뮤직 페스티벌'이 되지 않냐는 정체성의 문제였다. 실제로 재즈 공연보다는 에픽 하이나 크러쉬 같은 힙합 아티스트들의 무대에 팬들이 더 많이 몰리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재즈 팬들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초여름의 문턱 앞에서 쾌청한 날씨의 도심 속 잔잔히 흐르는 음악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꼭 음악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더라도 일상에 지친 이들, 나른한 공원에서의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자 하는 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페스티벌이 없다. 게다가 로린 힐 같은 멋진 헤드라이너와 알찬 라인업까지 더해졌으니 아주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푸르고 낭만적인 5월 19일의 1일 차 공연으로 2018년 음악 페스티벌 일대기가 시작됐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중음악웹진 이즘(www.izm.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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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 (2013-2021)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편집장 (2019-2021) 메일 : zener1218@gmail.com 더 많은 글 : brunch.co.kr/@zenerkre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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