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N <라이프 온 마스> 방송화면 캡처.

OCN <라이프 온 마스> 속 고아성(윤나영 역). 깔끔하게 경찰 제복을 차려입은 윤 순경의 주 업무는 설거지다. ⓒ CJ E&M


"미스윤, 윤양, 윤마담... 아니면 어이? 편한 대로 부르세요."

OCN <라이프 온 마스>의 홍일점 윤나영(고아성 분)은 순경이다. 하지만 그녀의 업무는 전화 받기, 커피 타기, 설거지, 빨래, 사택 청소. 경찰들 중 유일하게 각잡힌 제복을 입고 등장하지만, 손에 쟁반이 들려있을 때가 많다. 윤나영이 살고 있는 1988년. 그때 대한민국의 여경들은 '경찰'이 아닌, 남자 경찰들을 위한 잔심부름꾼, 혹은 식모 정도였던 듯하다.

심지어 수사한답시고 몰려나가 다방에서 농땡이나 치고 있던 한 남자 경찰은 윤 순경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윤양아, 여기 온 김에 마담 언니한테 커피 타는 것 좀 배워라. 여기 커피 맛이 기가 막히다."

이런 윤나영에게 2018년에서 온 남자, 한태주(정경호 분)은 그야말로 '별에서 온 그대'다. 한태주 역시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딱히 친절하다거나, 의식이 깨인 남자는 아니다. 그저, 여성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자기가 먹은 컵은 스스로 설거지할 뿐이다. 그리고 '윤 순경'을 '윤 순경'이라고 불러주는 정도.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들은 1988년의 윤나영에게는 파격이다.

"윤양아, 온 김에 커피 타는 것 좀 배워가라" 

 OCN <라이프 온 마스> 방송화면 캡처.

OCN <라이프 온 마스> 방송화면 캡처. ⓒ CJ E&M


윤나영은 한태주가 오기 전까지 '경찰'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저 그 시대상과 가치관 속에서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한 건 아니었다. (졸업은 못 했지만) 심리학 전공을 십분 살려 사건의 유형과 패턴, 범죄자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여기에 자신을 인질로 잡은 범인을 주저 없이 메치고 팔꿈치로 내려찍을 만큼 무술 실력도 수준급. 자기보다 키가 세네 뼘은 큰 남자가 목을 조르고 주먹을 휘두르는데도 절대 놓지 않을 만큼 용기도, 투지도 대단하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지만, 말끔한 살해 피해자의 얼굴이나 마지막 사체의 자세를 보고 '단순 분노가 아니라 숨겨진 욕망을 투영할 대상을 찾기 위한 것'일 거라는 해석도 내놓는다. 비록 중퇴했지만, 대학에서 전공한 심리학적 지식과 치밀한 자료조사, 작은 단서나 증거조차 허투루 대하지 않는 꼼꼼함의 결과물이다.

이에 반해 배운 것도 없고 성질만 더러운 이용기(오대환 분) 경사, 아직은 어리숙하고 굼뜬 조남식(노종현) 경장은 윤나영에 비해 경찰로서 한참 모자라다. 강동철(박성웅 분) 계장은 사건 해결 능력도 뛰어나고 촉도 감도 좋지만,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그야말로 '옛날' 경찰. 한태주 역시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원리원칙을 지키며 수사하는 경찰이지만, 그가 이들보다 30년이나 앞선 수사 기법을 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라이프 온 마스> 속 여러 경찰 캐릭터 중 가장 뛰어난 능력자는 바로 윤나영일 것이다.

2018년의 눈으로 본 1988년... 2048년의 눈으로 본 2018년은? 

 OCN <라이프 온 마스> 방송화면 캡처.

윤나영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실력을 가졌어도, 수사는 모두 남자 경찰들의 일이다. ⓒ CJ E&M


하지만 윤나영은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수사에게 배제되어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설거지나 하고, 그에 한참 모자라는 실력을 지닌 이용기나 조남식은 그저 '남자'라는 이유로 수사 업무를 한다.

그런 윤나영을 온전히 경찰로서 인정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보아주는 이는, 30년이나 앞선 미래에서 온 한태주 뿐이다. 스토킹 범죄 용의자를 홀로 쫓다 폭행을 당한 윤나영의 얼굴을 보고 강동철은 "고운 얼굴에 스크래치가 났다"며 안쓰러워했지만, 한태주는 "잘했다"고 칭찬한 것처럼. 강동철은 윤나영을 '여자'로, 한태주는 '경찰'로 여긴 것이다.

언뜻 이런 구도는 윤나영을 한태주의 등장으로 스스로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캐릭터가 변화되는, 수동적 인물로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과 공고한 성차별의 벽에도, 수사력을 키우고 무술을 연마해온 것은 윤나영이다. 퇴근 후 사건 현장에 가서 증거를 모은 것도, 강력계 계장도 깜짝 놀랄 만큼의 무술 실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도, 다른 경찰들이 쓰레기라며 버린 찢어진 전단지를 모아 사건 장소를 알아낸 것도, 한태주가 미래에서 오기 한참 전부터, 혹은 한태주와는 상관없이, 윤나영 스스로가 한 노력이었다.

이처럼 윤나영은 시대상에 갇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라진 그 시대의 여성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2018년 우리의 눈에 경악스러운 상황과 말들이 당연하듯 행해지는 1988년의 모습을 보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2048년의 상식적인 기준과 잣대에 비춰 오늘의 상식과 일상은 얼마나 한심한 수준일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여길지도 모르지만, 1988년에는 그저 여자에게 '경찰'이라는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세계에 발 디딜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성 평등이 '충분히' 이뤄졌다 보았을 것이다.

2018년, 윤나영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OCN <라이프 온 마스> 방송화면 캡처.

OCN <라이프 온 마스> 방송화면 캡처. ⓒ CJ E&M


분명 <라이프 온 마스> 스토리의 기둥은 과거로 간 것인지, 코마상태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1988년의 한태주다. 한태주의 과거와 매니큐어 살인사건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와 1988년 형사 강동철의 수사극이 가장 큰 줄기다.

하지만 이들의 수사 언저리에서, 조금씩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윤나영의 변화와 성장 역시 관전 포인트로 꼽을 만하다. 여전히 주변 남자 경찰들은 수사의 결정적 증언을 확보한 윤나영의 실력보다, 수사를 위해 짧은 치마를 입은 그의 각선미 칭찬이나 하고 있는 현실. 그러나 윤나영은 이런 답답한 현실의 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고 진화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윤나영의 성장은 이미 강동철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지만 말이다.

결국 한태주는 2018년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태주가 만나게 될 2018년의 윤나영은 어떤 모습일까? 이수정 교수와 같은 멋진 프로파일러가 되어 있지는 않을지, 얼마나 많은 경찰 조직 안의 금녀의 벽과 유리 천장을 허물었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지금까지 그려진 모습으로 보건대, 윤나영은 달라진 시대상과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금녀의 벽'의 맨 앞에 서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라이프 온 마스 고아성 정경호 박성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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