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DF(EBS 국제다큐영화제)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는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 <마지 도리스>와 <모리야마 씨>는 한 사람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그저 1인의 의미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다. 다큐들은 개인을 통해 사회와 문화를 바라본다. 우리가 아는 세상 너머에 여전히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향유하고 지키고자 하거나 혹은 즐기고자 하는 문화를 통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지평은 넓어진다.

74살에도 건재한 순록지기이자 예술가, 마지 도리스

 <마지 도리스> 스틸컷

<마지 도리스> 스틸컷 ⓒ EIDF


어릴 적 읽었던 북유럽 동화책에서 '라플란드'는 하얀 자작나무가 자라고 오로라가 빛나는 신비한 북극의 땅이었다. 순록과 눈썰매가 있어야 갈 수 있는 곳. 동화 속에서 만난 그곳은 실존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라플란드의 이미지도 그럴 것이다. 스웨덴의 1/4을 차지하고 노르웨이와 핀란드와 국경을 마주한 이곳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가 쉽겠는가. 하물며 그곳에 일찍이 석기시대부터 순록을 키우며 살던 원주민 사미족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영화 <마지 도리스>는 바로 라플란드의 원주민 사미족의 대표적 동명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1970년대부터 사미족의 전통적 공간인 라플란드의 정서가 담뿍 담긴 목공예·그림·연극으로 예술 활동을 해오던 마지. 그에게는  2017년의 겨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스웨덴 북부 파렌자르카에서 사는 마지에겐 그녀의 예술 활동만큼이나 겨울을 맞이하여 그녀의 농장으로 내려온 순록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마지 도리스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거의 다섯 시간을 걸려 이끼를 씻고 분류하여 순록에게 먹이는 일이다. 혹시나 솔잎이 섞이면 배탈이라도 날까 섬세하게 비벼대며 분류하는 손길. 순록에게 씻고 나누어주는 일상이 매일 매일 오다시피하는데, 한 걸음 떼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눈 속에서는 이마저도 그녀에게 큰 일이 된다. 이처럼 쉽지 않은 일을 마지는 지난 20여년간 해왔다. 그녀의 부모님이, 또 부모님의 부모님이 해왔던 전통대로. 봄이 되어 순록이 산으로 떠나면 2주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할 만큼, 순록은 그녀의 가장 최측근이 되었다. 순록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젊은 시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마지.

다큐는 쭈글쭈글한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이 무색하게 전통적 삶을 끈질기게 지켜내는 강인한 한 사람을 그려낸다. 긴 장화와 두터운 옷을 입고, 묵묵히 지붕에 올라 삽으로 눈을 치우고, 눈 속을 뚜벅뚜벅 걸어 순록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는 마지의 일상을 통해서 말이다. 오로지 눈과 순록과 광활한 북극의 하늘만이 채우는 그곳에서 알바를 하러 온 아프가니스탄인의 말처럼, 홀로 외로운 일상을 이어나가는 마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엄숙하다. 그 엄숙함의 행간을 채우는 건, 촉박한 전시회의 일정에 맞춘 예술 작업·음악들·순록의 형상을 한 목공들이다. 라플란드의 자연을 닮은 그림은 그 자체로 마지의 삶인 셈이다.

마지는 젊은 날 일찍이 파리, 캐나다 등 전 세계를 돌며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유롭게 살곤 했다. 이후 기나 긴 칩거에 들어갔고 이제 다시 그녀는 라플란드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탄광과 모피를 위해 침략당했던 땅, 갱도에서 신음했던 동포들의 역사를 호소하며 자신들의 전통과 언어의 공존을 호소한다. 74살의 나이에 순록을 돌보고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다지만 다음 겨울 순록과의 해후를 기대하는 여전히 꿋꿋한 라플란드의 대표적 예술가, 마지의 일상을 통해 라플란드가 빛난다.

"내게 집은 보다 사적인 공간이며 의미있는 곳이며
완벽하지 않은 곳이고 최신 유행을 따라가려 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며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아등바등대지 않는 곳이다.
집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 줄리 포인터 애담스, <와비사비 라이프>

노이즈뮤직처럼 편안함은 상대적인 것... 모리야마씨가 만든 도시의 숲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더는 모리야마씨에게 '집'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곳에 숲을 만들었다.

이후 숲 사이에 하얀 블럭이 점점이 박혔다. 층고에 따라 확장된 정육면체 건물에 뚫린 창문들, 창문에 펄럭이는 하얀 커튼. 하얀 건물과 파아란 하늘은 커튼을 이웃하여 혼연일체가 된다. 가장 직선적인 공간이 가장 자연친화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거기엔 집 대신 그저 나무 사이의 '공간(큐브)'이 있기 때문일 듯하다.

 <모리야마 씨>의 한 장면

<모리야마 씨>의 한 장면 ⓒ EIDF


모리야마씨의 집이자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니시자와 류에가 지은 모리야마 하우스는 동경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건축물이다. 모리야마 하우스를 만든 건 니시자와 류에이지만, 모리야마 하우스에 문화적 향취를 더한 건 바로 모리야마 자신이다. 마치 오래 전 옛집의 마당처럼 나무 아래에 마련된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이 곳 저 곳 옮겨다니며 대청 마루처럼 건물 창 밖으로 발을 늘어뜨리기도 하고. 창문에 거의 머리가 나오다시피 드러눕기도 하고, 하늘이 보이는 창가 소파에 다리를 걸치기도 하면서 가장 편한 자세로 모리야마씨가 가장 사랑하는 독서를 하는 일상. 그리고 모리야마씨는 자신의 비밀 공간인 지하 음악실을 찾아 음악이 된 소음들(노이즈 뮤직)을 경청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감독 일라 베카와 루이즈 르모안은 일본의 대표적 노이즈 뮤지션인 오모토 요시히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오모토 요시히데의 전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독특한 인물이 궁금해져 모리야마씨와 일주일을 보내고, 그 시간은 작품이 되었다. 창문 여닫는 소리, 별 것 아닌 잡음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되듯, 모리야마씨는 '편안함은 상대적'이라 말한다.

그리고 모리야마씨의 주장은 그대로 그의 공간 속을 관통한다. 열 개의 큐브 중 그가 사용하는 네 개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은 대여되었다. 대여된 건 그저 직육면체의 하얀 벽과 창문들뿐, 그 안의 공간은 소유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세계로 존중된다. 공간을 대여한 사람들은 나무 사이나 건물 사이 틈인 듯 마당인 듯 골목길인 듯한 공간에서 종종 만나 이방인과 조우하고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빛나는 불꽃을 태운다.

감독이 찾아가기 일주일 전 모리야마씨의 애완견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애완견은 집 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감독이 그곳을 지키는 작은 조각상의 의미를 묻자, 모리야마씨는 짧은 영어로 난감해 하며 '예수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모리야마씨 자신은 종교가 없으니, 그 조각상은 곧 물병이랑 다르지 않다고 덧붙인다. 모리야마씨의 이 짧은 설명은 '집이 아니지만 집이 된 공간'을 설명한다. 마치 소음이 모여 음악이 된 노이즈 음악처럼, 그저 하얀 큐브에 불과한 공간이 나무 사이에 자리 잡아 사람들이 삶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공간 말이다.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영화 <모리야마 씨>는 '와비사비'적(와비 사비, Wabi-sabi, わび・さび,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미적관념의 하나이다. 투박하고 조용한 상태를 가리킨다)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 트렌드로 대두된 '빠름에서 느림으로', '홀로에서 함께로', 그리고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으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EIDF2018 마지도리스 모리야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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