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8살이 된 KBO리그에서 외국인 감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제리 로이스터가 롯데 자이언츠 지휘봉을 잡은 게 2007년이고, 그 뒤를 이은 힐만 감독이 2017년 SK 자이언츠 사령탑으로 등장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현재 기아 타이거즈를 이끌고 있는 맷 윌리엄스 감독까지 역대 단 3명이 전부다. 로이스터 감독은 3년, 힐만 감독은 2년 동안 한국에서 머물러 이들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KBO리그를 거쳐 간 외국인 감독들은 대부분의 한국 야구팬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로이스터 감독은 당시 하위권에서 맴돌던 팀을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트레이 힐만 감독은 2018년 SK 와이번스를 정상으로 이끌며 한국 무대에서 우승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 로이스터-힐만 감독 시절을 합쳐 역대 외국인 감독들의 KBO리그 포스트시즌 진출 확률은 100%(5/5)였다.
 
 17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0 KBO리그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 앞서 KIA 윌리엄스 감독이 두산으로 이적한 홍건희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2020.7.17

17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0 KBO리그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 앞서 KIA 윌리엄스 감독이 두산으로 이적한 홍건희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2020.7.17 ⓒ 연합뉴스

 
KBO리그 첫 해인 윌리엄스 감독도 현재까지는 순항 중이다. 기아는 18일 현재 33승 27패. 승률 .550으로 4위에 올라있다. 개막 전까지 당초 5강도 쉽지 않은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선전하고 있다. 에이스 양현종이 예년보다 부진하고 김선빈-류지혁 등 부상선수가 속출하는 악재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은 윌리엄스 감독의 지도력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외국인 감독들이 KBO리그에서 기여한 진정한 공로는 단지 소속팀의 성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외국인 감독들의 존재 자체가 KBO리그에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는 측면이 적지 않다. 어쩌면 외국인 감독들이 기존 한국 야구의 관행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외부인'이기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로이스터와 힐만의 성공은 한국야구에서도 '메이저리그식 리더십'이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한국 프로야구는 초창기 이래 일본 야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감독들의 권위주의적 리더십, 선수 혹사, 상명하복과 서열을 강조하는 수직적 팀 문화 등은 부작용으로 지적되며 한국야구의 오랜 폐해로 자리잡기도 했다.

로이스터와 힐만 감독은 '선수 중심의 자율야구'를 표방했다. 감독이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호흡하고 소통하는 것을 중시했다. 로이스터 감독의 야구를 대표하는 슬로건은 '노 피어(No Fear)',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였다. 로이스터 감독은 중요한 고비에서 병살타를 치고 온 타자나, 정면승부 하다가 홈런을 맞은 투수에게 질타보다 박수를 보내기로 유명했다.

힐만 감독은 홈런을 치고들어온 타자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주먹으로 감독의 가슴을 치는 세리머니를 허용했다. 라인업을 정할 때는 항상 코치들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선수를 기용할 때도 단점을 보기보다 장점을 살리는 데 더 초점을 맞추면서 SK를 리그 최고의 홈런 군단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독의 절대 권위와 성적 지상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 지도자들에게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팬들을 대하는 태도도 개방적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롯데의 대표적인 응원가를 '부산 갈매기'를 열창하기도 했고, 힐만 감독은 배우 김보성을 코스프레하며 유행어인 '의리'를 따라하여 팬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자율 속의 책임' '경기는 즐기면서 승부는 치열한 야구'를 강조하는 외국인 감독들의 리더십은 야구단의 흥행 및 이미지 개선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스 감독도 소통-자율-긍정적 사고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기존 외국인 감독들의 리더십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윌리엄스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연패에 빠지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진중한 모습을 유지하며 선수단의 동요를 막았다. 선수가 부진하거나 실책을 저질러도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지 않고 선수를 존중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모습도 선수들에겐 귀감이 되고 있다. 윌리엄스 감독은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경기 전마다 관중석을 뛰어다니며 러닝을 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감독이 어지간한 선수보다 더 몸관리에 철저하니 지켜보는 선수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수가 없다.

다른 감독들과 소통하는 문화도 역대 외국인 감독 중 가장 적극적이다. 윌리엄스 감독은 최근 '와인 투어'로 상대 감독들과 교류하며 화제가 됐다. KBO리그 감독들에 대한 예우의 의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준비하여 경기에서 만날 때마다 선물한 것. 이에 상대 감독들도 소주, 갈비 등 각자 특색있는 선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화답하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경기 중에는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적장이지만, 경기밖에서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업자 의식을 드러낸 장면이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닐수도 있지만, 메이저리그 스타 플레이어 출신의 유명 감독이라는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국적을 떠나 해당 리그에 대한 존중, 상대 감독들에 대한 예우를 먼저 실천했다는 점에서 타 문화권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감독으로서 귀감이 될만한 장면이다. 먼저 예의를 다하면 상대도 마음을 열 수밖에 없다. 첫 외국인 감독이었던 로이스터 시절만해도 공공연하게 외국인 감독에 대한 텃세나 견제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국내 야구계의 문화도 많이 성숙해진 부분이다. 이는 감독 개개인의 교류 차원을 넘어 KBO리그의 품격을 높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사회의 발전이란 거대한 이벤트나 급진적인 변화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소소하지만 작은 변화 시도들이 천천히 누적되면서 어느새 세상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기도 한다. 외국인 감독들이 KBO리그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도 그와 같다.

소통-자율야구-긍정의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감독들이 남긴 성과들이, 그들이 등장하기 이전과 비교하여 KBO리그의 문화를 얼마나 크게 바꾸어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KBO리그가 외국인 감독과 새로운 리더십을 받아들이는 데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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