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개봉한 영화 <카모메 식당>을 '인생 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낯선 핀란드의 도시 헬싱키에 살게 된 일본 여성 사치에가 작은 식당을 열고 소박한 주먹밥을 만들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힐링'이 되었다. 덕분에 누군가는 꼭 핀란드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일본식 주먹밥이 로망의 음식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건 '덤덤'하다 싶을 만큼 온유한 정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낯선 도시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어느 틈에 따스하게 어우러지는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카모메 식당>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일본 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이 반가울 듯하다. <카모메 식당>을 쓴 무레 요코의 소설을 4부작으로 만든 드라마에는 <카모메 식당>과 마찬가지로 코바야시 사토미와 모타미 마사코가 출연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직장에선 밀려나고 
 
 일본 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포스터

일본 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포스터 ⓒ Netflix

 
<카모메 식당>과 마찬가지로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이하 <빵과 스프>)을 이끄는 건 코바야시 사토미다. 영화에서는 핀란드에서 식당을 연 사치에의 사치에의 사연이 생략된 것과 달리, 드라마는 코바야시 사토미가 분한 아키코에게 닥친 인생의 위기로부터 시작된다.

나이 50세, 출판사에서 신입 직원에게 멘토 역할을 하고, 작가에게 새로운 작품을 요청하는 위치에 오른 아키코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그녀 인생의 물길을 바꾼다. 가요씨, 오랫동안 식당을 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평생 몸담았던 '편집' 일에서 '좌천'에 가까운 전보 발령을 받았다. 이유는 '나이'였다. 결국 하루 아침에 아키코는 엄마도 잃고, 직장도 잃은 처지가 된다. 

어머니는 아키코가 어린 시절부터 그 동네에서 식당을 해오셨다. 이른바 터줏대감이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식당이 문을 닫았을 때 맞은 편 까페 사장님은 대놓고 문을 오래 닫은 가게가 이 거리를 위축시킨다고 말씀하신다. 늘 어머니의 식당에 모여 늦은 밤까지 술자리를 가지던 동네 문방구와 꽃집 주인들 역시 어머니의 빈 자리를 아쉬워한다. 

그래서였을까. 결국 아키코는 어머니의 식당을 연다. 그런데 어머니 가요씨가 하시던 그 식당이 아니다. '이렇게 싼 가격에 어떻게 장사를 했을까' 싶을 만큼 다양한 메뉴에 술까지 팔았던 어머니 가요씨의 식당은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겨우 두 가지 종류의 샌드위치와 그에 맞춘 스프의 단출한 식당으로 거듭난다. 심지어 카페 사장님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아키코는 그날 마련한 신선한 재료가 소진될 때까지만 판다. 

일본의 '식당'들은 대를 이은 '장인 정신'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가요씨가 돌아가셨을 때 주변 사람들이 은근히 아키코에게 바랬던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서라도 가요씨의 식당이 이어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키코는 '식당'을 이어받았지만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다른 메뉴로,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직업'에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아키코의 불량한 도전 

드라마에서 주변 사람들은 아키코를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저러한 조언을 한다. 어머니의 전통에 대해서, 그리고 식당을 융성하게 하는 방편에 대해서, 아키코는 조언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식당이 흉흉하니 꽃조차 흉흉한 꽃이 핀다는 식의 조언인지 악담인지조차 모를 말에 대해서도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아키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삶을 다시 만들어 간다. 50세, 새로 시작하기 쉽지 않은 나이에 평생 해보지 않을 길을 걸어가는 아키코의 방식이 주는 울림은 그래서 크다. 

담담하게 진행되는 4편의 드라마, 하지만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 드라마와 다르지 않은 '자극적 설정'들이 포진되어 있다. 하나뿐인 혈육의 죽음, 실직, 그리고 뒤늦게 밝혀진 출생의 비밀에 배다른 동생 출현에 알고보면 오랜 어머니와의 '애증'까지 드라마적 요소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런 극적인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극 초반 어머니를 잃은 아키코가 표정이 너무 없어 어머니를 잃은 걸 슬퍼하지 않는 게 아닌가라는 대사가 등장할 정도로,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드라마 4회를 완주하고 나면 안다. 4회에 가서 주변 사람들과 밝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그녀의 모습에서 극 초반 그녀의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힘들었던가를.  

하지만 드라마는 삶의 고개를 넘어가는 버거움을 소리치지 않는다. 대신, 이복 동생의 절을 찾아간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수행'이라 담담하게 토로하는 장면을 통해, 상실의 시간을 견디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처지가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엿보게 만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을 찾아온 고양이와 함께 하며 살아지는 시간들에 대한 표현을 통해 그녀가 겪어가는 시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뒤늦게 동네 지인과 술 한 잔을 나누며 그녀는 담담하게 토로한다. 동네 사람들이 의연하다며 칭송해 마지 않는 어머니와의 삶이 편치만은 않았음을. 그래서 어머니를 보낸 시간이 그녀에게 후회로 다가왔음을. 

드라마는 상실의 고통을 토해내는 대신 착실하게 삶의 여정을 이어가는 아키코를 보여주면서 '상실'을 견디는 시간을 함께 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두려움을 드러내어 호소하는 대신 낯선 도시의 두려움을 <카모메 식당>의 메뉴로 치환하듯, 새로 시작하는 식당의 단출하지만 풍성한 레시피로 채워낸다. 1회, 신입 직원에게 '부딪쳐 보라' 조언하듯, 아키코 역시 스스로 부딪쳐간다. 그녀가 평생 해보지 않았던 식당에도,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일본 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스틸 컷

일본 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스틸 컷 ⓒ Netflix

 
소설 원작과 달리 '고양이'의 역할이 '귀여운 마스코트'같은 조연으로 조금 밀려난 대신, 그 자리를 아르바이트 생과 동네 지인들, 손님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이 채워간다. 깍뜻하지만 거리를 두었던 아키코는 4회라는 짧은 회차 동안 어머니의 빈 자리를, 아니 어쩌면 그녀 평생에 비워졌던 관계의 온기를 채워나간다. 

4회, 아키코는 스스로 말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불량'할 도전에 대해. 아키코의 식당 개업기라 할 <빵과 스프>는 4회라는 짧은 회차를 통해 상실의 시간을 이겨내는 자세에 대하여,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의 방식에 대하여 담담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를 전한다. 2013년의 작품이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이 작품이 매혹적인 이유이다. 잔잔한 서사와 달리 아이러니 하게도 주먹밥이 뭐라고 그걸 먹고 싶게 만들었던 <카모메 식당>처럼 갖가지 샌드위치와 스프의 향연이 미식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5252-jh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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