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여성 중 소수이긴 하지만 60·70대의 노인이 있다고 말했을 때, 모임의 분위기가 모래 광풍이라도 덮친 듯 서걱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럴 리가'하는 불신과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단 말이야'라는 혐오를 내포한 거부 반응이 충격의 주를 이루는 정서였다.
 
이 같은 반응은 가난한 여성 노인으로 표상되는 이미지가 주로 폐지 줍는 할머니로 구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몸에 몇 배나 되는 짐을 이고 지고 수레를 끄는 여성 노인의 모습은, 그래도 '열심히 일하니까'라며 근면에 근거한 동정표를 쉽게 주게 한다. 하지만 성매매로 생계를 잇는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해진다. 폐지를 줍건 성을 팔건, 이들이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모두 먹고살기 위해서지만, 노동을 바라보는 위계는 냉혹하다.
 
65세의 '박카스 할머니'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 이미지.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 이미지. ⓒ CGV 아트하우스

 
<죽여주는 여자> 속 주인공 소영(윤여정)은 환갑을 훌쩍 넘은 65세의 나이지만 스스로 돈벌이를 해야 살아갈 수 있다. 일명 '박카스 할머니'로 불리는 그는 주로 남성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다. 노후설계는커녕, 아파도 연락할 가족이나 친구조차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비쩍 마른 등조차 기댈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현실은 얼마나 큰 고립일까? 수영은 이렇게 한평생을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왔다.
 
늙고 가난한 여자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있을 리 없다. 먹고살아야 하는데 다른 도리가 없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 호구지책이 성매매다. 어려서 흘러 들어간 기지촌도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그곳을 떠났다고 달리 생계를 이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영은 우연히 '코피노'(필리핀에서,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이르는 말) 민호를 만나게 되면서 아프게 묻어둔 과거와 만나게 된다. 민호가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려진 상처는 그의 환부를 건드리는데, 과거 미군과의 사이에서 낳았지만 지키지 못한 혼혈아들이 강렬히 환기되기 때문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민호를 보호하며 서툴지만 진심을 다하는 소영의 모습에선, 그 본질이 연민이든 죄책감이든, 과거 그녀가 미처 다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감정이 뜻하지 않게 넘쳐버리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입양되어 낯선 곳에서 외롭게 살아갔을 아들의 신산한 처지가 코피노 민호에게 강렬히 이입되었을 터다. 하루 벌어먹고 사는 소영의 처지로는 누구를 돌볼 상황이 아니지만, 민호를 보며 자신의 아들과 문득문득 조우하는 그는 진심을 다한다. 적막했을 내 아들을 누군가 보듬어주기를 바랐을 엄마의 마음이, 그때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과 책임이, 낯선 아이에게 이전되고 있었다.
 
아들이라기보다 손자에 가까운 민호를 보살피며 가만가만 자신의 환부를 더듬던 소영은, 성 서비스를 제공했던 한 남자에게서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는다. 뇌출혈로 꼼짝없이 병상에 결박된 과거의 손님은 먹는 것도 싸는 것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이 견딜 수 없다. "사는 게 창피"한 그는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소영은 그만 죽고 싶다는 손님의 감정에 공감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그리하여 그녀는 누군가의 죽을 권리에 적극적으로 조력하는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그의 조력은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윤리적 논쟁의 여지가 있다. 소영의 조력을 자살의 방조로 간주하고 비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남은 생을 침상에서 보내야 하는 환자가 왜 그런 선택을 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가가 먼저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 돌봄이 그저, 시설에 유폐되어 병상에 누워 있는 처치 곤란한 늙은이의 밥 수발을 들거나 똥 기저귀를 가는 것으로만 상상되는 현실이라면, 누가 그런 불쌍한 늙은이의 처지가 되고 싶겠는가 말이다. 소영의 조력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귀결되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 드리운 노인 돌봄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이냐의 논쟁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해야 먹고사는 여성들
 
 영화 <69세> 스틸 이미지.

영화 <69세>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더 답답한 것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게토화된 돌봄 노동에 대거 진입한 노동인력 또한 대부분 빈곤한 여성 노인이라는 뼈아픈 현실이다. 영화 <69세>의 주인공 효정(예수정)은 69세의 간병인이다. 효정 역시 달리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자 호구지책으로 중증 노인 환자를 간병한다. 중증 노인 환자를 돌보는 이유는 이런 경우 환자의 집에 머물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증 환자라고 성적으로 간병인을 추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들이 남성 환자의 성추행에 상시로 노출되어 고통받고 있다.
 
효정은 69세의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떤 젊은 놈이 늙은 여자를 성폭행하겠냐는 모두의 불신 앞에 효정은 무력하다. 늙은 여자는 성폭행당하지 않는다는 야만적 믿음은 아직도 성폭행을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보는 뿌리 깊은 남성 강간 문화의 결과다.
 
성폭행을 당하고 동거하던 노인에게조차 불신 당하자 효정은 기거하던 집을 떠난다. 떠났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는 가난한 여성 노인을 기다리는 곳은 없다. 오갈 데 없는 몸을 부리려면 성추행이 벌어질지 모르더라도 다시 간병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돌봄 인연이 있던 한 집에 다시 붙박이 간병인으로 들어 간 효정은 중증 환자를 먹이고 배변시키고 씻기느라 삭신이 녹아난다.
 
간병으로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성폭행의 위험에 놓이더라도 효정은 일을 멈출 수 없다. 일을 멈춘다는 것은 곧 입에 밥이 들어오지 않는 위기 즉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이, 교도소에 갇히면 "세 끼 밥은 주지 않나"며 "차라리 잘 됐"다고 해대는 넋두리는 전혀 과장된 감정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중노동으로 먹고산 여성 노인이 맘 편히 쉴 곳이 고작 감옥이라는 현실은 참담하다. 소영과 효정 같은 가난한 여성에게 먹고사는 일은 이렇듯 언제나 가장 무거운 삶의 무게였다.
 
여성 빈곤이 남성 빈곤에 비해 더 심각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5월 30일 발표된 여성가족부 '2020년 가족 실태조사'를 보면, 일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0.4%로 급격히 늘었고, 이중 여성(53%)이 남성(47%)에 비해 많고, 연령대는 50대 이상이 61.1%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50대 이상의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소외받을 것은 뻔한 일이고, 어찌어찌 노동 시장에 편입되어 있더라도,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계를 잇고 있을 것이다. 위태롭게 먹고살아야 하는 소영과 효정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또한 젊은 소영과 효정들 역시 언젠가 늙을 것이고 급속히 진행되는 고령화 사회에서 살아남는 일은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며칠 전 친구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착잡했다. 그 친구 말고도 이미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지인과 친구도 여럿 있다. 이중 일인 가구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도 몇 있어 마음이 무겁다. 모두 지금 극단적 빈곤 상태는 아니지만, 향후 십 년 이십 년 후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맘 편히 노년을 기다릴 처지가 전혀 아닌 것이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100세 세상이 가난한 여성 노인에게 무서운 저주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누구도 저주를 스스로 풀 수는 없다. 국가가 응답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죽여주는 여자> <69세> 윤여정 여성 빈곤 여성 노동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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