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 팩(왼쪽)과 브루노 마스(오른쪽)의 프로젝트 그룹 '실크 소닉'은 올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상과 올해의 레코드상을 모두 받았다.

앤더슨 팩(왼쪽)과 브루노 마스(오른쪽)의 프로젝트 그룹 '실크 소닉'은 올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상과 올해의 레코드상을 모두 받았다. ⓒ Recording Academy

 

지난 4월 3일(현지 시각 기준), 제64회 그래미 어워드 무대에서 공연한 방탄소년단은 처음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섰던 2019년과 달랐다. '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라이징 스타가 아니었다. 비록 수상이 기대되었던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상은 도자 캣과 시저(SZA)의 'Kiss Me More'에게 돌아갔지만, 방탄소년단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기사에서는 방탄소년단 이외에도, 기억해야 하는 그래미 어워드의 순간들을 톺아보고자 한다.

올해는 '몰아주기' 없었다

네 개의 주요 부문(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올해의 레코드상,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상)의 시상의 경우, 2020년과 같은 '몰아주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당시 빌리 아일리시는 4개의 주요 부문을 모두 수상했다). 올해 그래미의 주인공은 단연 '실크 소닉'이었다. 실크소닉은 브루노 마스와 앤더슨 팩이 결성한 슈퍼 그룹이다.

실크 소닉의 'Leave The Door Open'은 올해의 노래상과 올해의 레코드상을 모두 수상했다. 익살스러운 세레머니와 함께 무대에 오른 앤더슨 팩은 '우리는 겸손하고자 노력하겠지만, 싹쓸이를 했다'며 으스댔다. 'Drivers License'와 'Good 4 U'로 2021년을 장악한 10대 여성 가수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상을 비롯, 최우수 팝 솔로 퍼포먼스, 최우수 팝 보컬 앨범을 두루 수상했다.
 
 2022 제6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존 바티스트의 'We Are'

2022 제6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존 바티스트의 'We Are' ⓒ 유니버설뮤직



올해의 앨범상은 존 바티스트의 앨범 < We Are >가 차지했다. < We Are >는 재즈와 소울, 가스펠 등 다양한 흑인 음악의 갈래를 하나로 엮은 작품이다. 올해 본상을 수상한 뮤지션 중 가장 인지도가 낮지만, 미국 CBS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의 밴드 리더이자,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의 음악 감독으로도 알려진 실력자다.

존 바티스트는 올해의 앨범상을 포함, 총 다섯 개의 트로피를 받으며 5관왕이 되었다. 20세기 흑인 음악에 대한 복각, 장르적 정통성을 선호하는 그래미의 취향을 잘 보여 주었다. 두 개의 본상을 받은 실크 소닉의 'Leave The Door Open' 역시 노골적으로 6~70년대 소울 음악의 향수를 자극했다.

제64회 그래미 어워드는 지금까지 주로 진행되었던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가 아닌 라스베이거스로 옮겨 진행되었다. 팬데믹의 한가운데 열렸던 2021년 시상식과 달리, 관중들이 있는 상태에서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아티스트들은 지난해에 비해 더욱 역동적인 공연을 선보일 수 있었다.

'신구'가 공존했다.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장 조니 미첼은 포크록 뮤지션 브랜디 칼라일을 소개했다. 브랜디 칼라일이 조니 미첼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의 의미는 더 깊었다.

알앤비 뮤지션 H.E.R는 레니 크라비츠, 그리고 팝 펑크 열풍의 상징인 트래비스 바커와 독특한 조합을 선보였다. 힙합 거장인 나스는 지난해 첫 그래미를 수상한 데에 이어, 올해에는 첫 단독 무대를 할애받았다. 켄드릭 라마의 사촌 동생으로 알려진 래퍼 베이비 킴(Baby Keem), 여성의 삶을 진중하게 그린 알앤비 뮤지션 재즈민 설리반 등 현재 씬에서 중요한 뮤지션들 역시 얼굴도장을 찍었다.

존중과 역사를 모두 챙긴 그래미
 
 빌리 아일리시(오른쪽)은 푸 파이터스의 테일러 호킨스를 추모하는 티셔츠를 입고 공연했다.

빌리 아일리시(오른쪽)은 푸 파이터스의 테일러 호킨스를 추모하는 티셔츠를 입고 공연했다. ⓒ FINNEAS 공식 페이스북

 

이번 시상식은 '존중'이라는 지점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을 남겼다. 레이디 가가는 알츠하이머로 무대에 서지 못한 토니 베넷에게 존경의 노래를 보냈다. 빌리 아일리시는 비가 내리는 모습으로 연출된 무대에서 'Happier Than Ever'를 불렀다. 오빠이자 프로듀서인 피니어스의 일렉 기타에 맞춰, 록커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빌리 아일리시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푸 파이터스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임했다. 위대한 록 드러머를 추모하는 진정성이 빛난 순간이다(이날 푸 파이터스는 3개의 트로피를 받으면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그래미 트로피를 받은 미국 그룹으로 올라섰다. 공연 역시 예정되어 있었으나,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사망하면서 참석이 취소되었다).

한편 무대 뒤에서 아티스트들의 일을 돕는 스태프들에게 아티스트 소개를 맡기는 장면 역시 박수를 자아냈다. 대중음악과 공연은 결코 슈퍼스타의 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시상식 중반에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고 있는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가 등장했다. 영상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는 음악이 아닌 적막만이 흐르고 있다", "이 정적을 노래로 채워 달라"는 호소를 남겼다. 뒤이어 존 레전드가 무대 위에 올라 신곡 'Free'를 불렀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수 미카 뉴턴 등도 함께 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초국적적 연대의 기능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And we're just sayin' Lord. Rain down freedom. Rain down' til we're all"
(신이시여. 우리에게 비처럼 자유를 내려 주소서.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 'Free' 중


수년간 그래미의 위기는 뚜렷했다. '화이트 그래미(백인 중심적인 그래미)'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음악계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공격도 받았다. 이 논란에 심사위원단에 여성과 유색인종의 비중을 높이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윽고 2020년을 강타한 위켄드(The Weeknd)가 어떤 부문의 후보에도 선정되지 못하는 '위켄드 스넙'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미의 주요 결과를 왜곡하는 '비밀위원회'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닐 포트나우, 조엘 카츠 등 레코딩 아카데미 주요 간부들의 성범죄 혐의 역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여론에 비례해, 시청률은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렸다.

누군가는 그래미의 시상 결과에 불만족하면서 '로컬 잔치에 연연할 필요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올해의 그래미 어워드는, 단순히 그래미가 '한물간 로컬 잔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의구심 대신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 주었으며, 환란의 시대에 음악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를 보여주었다. 구세대의 영웅과 현세대의 주인공 역시 공존했다. 우리 가요계에도 이런 로컬 잔치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미 어워드 그래미 실크 소닉 존 바티스트 올리비아 로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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