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좌파란 무엇인가? 묻는 것만으로 뒤통수가 따가워지는 질문이다. 정치사상의 경향을 나타내는 개념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실질적인 의미보다 일종의 낙인으로 쓰였다. 반공주의, 개발 이데올로기, 민주화 운동을 거친 '좌파'는 구심력 있는 단어가 되었다. 무엇이든 '좌파' 타이틀이 붙으면, 순식간에 이념 싸움으로 번진다. 그러나 싸움은 본질만 흐릴 뿐, 더 나은 공론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은 영화 <파묘>의 흥행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26일 자신의 SNS에 "반일주의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이를 덮어버리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를 한다. <파묘>와 <듄2>로 관객이 몰리면 가장 큰 타격은 (<건국전쟁>의) 극장 수, 스크린의 감소"라며 "이 고비를 넘어야 <노무현입니다>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티켓값이 천정부지를 찍는데 200만 명 넘는 관객이 '분풀이'를 위해 <파묘>를 관람한 것일까. <파묘>에 얽힌 오해, 혹은 예술에 대한 오독이 아닐 수 없다.

오컬트의 탈을 쓴 <파묘>의 매국노 처단기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가 개봉 사흘째인 지난 24일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배급사 쇼박스가 밝혔다. 올해 개봉한 영화로는 가장 짧은 기간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진은 25일 서울 한 영화관의 영화 홍보물.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가 개봉 사흘째인 지난 24일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배급사 쇼박스가 밝혔다. 올해 개봉한 영화로는 가장 짧은 기간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진은 25일 서울 한 영화관의 영화 홍보물. ⓒ 연합뉴스

 
영화 <파묘>는 어느 미국 부잣집의 의뢰에서 시작한다. 의뢰인은 무당 '화림(김고은 분)'에게 큰 형이 정신병원에 있다가 자살한 이후부터 눈을 감으면 알 수 없는 비명이 들리고, 아이 또한 아프다고 털어놓는다. 화림의 진단은 묫바람, 즉 조상 중 누군가 불편하다며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화림은 지관 김상덕(최민식 분), 장의사 고영근(유해진 분), 제자인 법사 봉길(이도현 분)과 함께 의뢰인의 조상 묘를 옮기게 된다.

수상한 건 의뢰인의 출처 모를 부(富). "태어날 때부터 밑도 끝도 없이 부자"라는 의뢰인은 알고 보니 "나라를 팔아먹어 관직을 크게 받은" 매국노의 후손이었다. 그제야 집안 전체가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의뢰인의 이야기와 일제강점기 시절 군복을 입고 사진 찍힌 조상의 실체가 밝혀진다.

<파묘>는 일제강점기에 얽힌 여러 요소를 곳곳에 숨겼다. 조선의 정기를 끊어내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역사적 이야기를 차용해 줄거리로 삼았고, 주인공들의 이름은 실제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일치한다. 또한 세대와 가치관이 다른 네 명의 인물이 일본 요괴를 처단하는 서사는 현대사의 거친 풍랑으로 벌어진 세대 차이 속 새로운 합심을 암시한다.

관객들은 "오컬트 영화인 줄 알았는데 사실 역사 영화였다", "한국의 무속신앙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영화", "독립운동가에 대한 비유가 많아서 해석하는 재미가 있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대다수다. 개봉 나흘 만에 292만 명(28일 오전 기준)을 돌파한 <파묘>는 <서울의 봄>보다 빠른 속도로 흥행몰이 중이다.
 
일본 요괴 처단하는 영화가 좌파?
 
 영화 <파묘> 스틸 이미지

영화 <파묘> 스틸 이미지 ⓒ ㈜쇼박스

 
<파묘>를 팔수록 '좌파' 영화라는 호칭에 의구심이 든다. 일제 강점기 때 부를 이룩한 가문이 위기를 맞는 서사가, 일본 요괴에 맞서 싸운다는 핵심 내용이, 한반도의 끊긴 허리를 되찾는 결말이 '좌파'라면 도대체 그토록 '좌파' 영화를 경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제 터전을 지키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좌파'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욱 올바른 사상이란 말인가.

메시지가 없는 영화란 없다. <파묘>도 마찬가지. 무속신앙, 역사, 민족성 등 한국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파묘>는 다양한 메시지로 해석된다. 보는 이에 따라 오컬트 영화일 수도, 역사 영화일 수도, 혹은 MZ와 꼰대가 힘을 합쳐 악당을 없애는 마블 영화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충실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예술은 도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맹렬한 메시지만 남은 예술은 관객마저 꿰뚫어 도구로 사용한다. 예술이 이념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관객은 예술을 즐기는 존재가 아닌 이념을 증명하기 위한 숫자가 된다. 마치 패싸움처럼 관객 수를 비교하여 영화의 우위를 논하거나 넘어서야 하는 적으로 간주한다면 예술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철학가 질 리포베츠키는 "표현의 수단이 크면 클수록 정작 이야기할 내용은 적어진다"고 말했다. 한 편의 영화로 좌파와 우파를 논하고, 흥행 싸움을 이념 싸움으로 바꾸는 것은 영화와 예술이 지닌 힘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다. 무엇보다 특정 프레임을 통해 영화가 지닌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건 영화계 전반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좌파란 무엇인가. 아니, 누군가를 '좌파'로 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든 덮어씌우면 문제가 되는 '좌파' 프레임에 <파묘>가 걸렸다. 한국의 독립을 외치는 민족주의적 영화가 좌파라니, 영화 속 일본 요괴를 내쫓는 굿이 현실에서도 간절하다.
파묘 좌파 건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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