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사고로 무너진 건물들
익산시
옛 이리역(익산역)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도심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에 서 있던 나지막한 건물들은 모조리 무너져 내렸고, 바닥은 온통 깨진 유리 조각들로 뒤덮였다. 전기가 끊긴 도심은 한순간에 암흑천지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불빛 한 점 없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대체 이 엄청난 폭발 사고는 왜 일어났을까.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사고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1월 9일 오후 9시 43분,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가 만든 다이너마이트 914상자(22t)와 초산암모늄 200상자(5t), 초산암모늄 폭약 100상자(2t), 뇌관 36상자(1t) 등을 실은 화물차가 인천역을 떠났다. 인천의 한국화약적재소에서 실려 온 것들로 최종 목적지는 광주였다. 화물의 운송을 맡은 이는 호송원 신무일 씨였다.
영등포역을 거쳐 다음 날인 10일 오후 10시 31분 옛 이리역에 도착한 열차는 4번 입환대기선(기관차와 연결·분리하려고 화물차나 객차가 대기하는 곳)에 멈춰 섰다. 당시 '폭발물 철도 운송규정 제46조 화약류의 운송'에 따르면, '화약류는 되도록 도착정거장까지 직통하는 열차에 의하여 운송하여야' 했지만 이 화물차는 그러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관차를 배정하는 직원들이 신씨에게 이른바 '급행료'라는 뒷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돈이 없던 신씨는 별수 없이 하루가 넘도록 역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다음 날인 11일 저녁이 되도록 출발을 못 한 신씨는 역 앞 식당으로 나가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잠을 자려고 다이너마이트가 실린 화물차로 돌아왔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이라고 해도 들어갈 수 없도록 하고 있었지만 잠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그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신씨는 총포화약류 취급면허조차 없었다.
신씨는 가지고 있던 양초에 불을 붙여 상자 위에 세워두고는 침낭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이 화끈해 일어난 그의 눈앞엔 불에 타고 있는 상자들이 들어왔다. 촛불이 쓰러지면서 상자에 불이 옮겨붙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