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이리농림학교 학생들 모습
익산시
최태훈 원장의 아버지도 이리농림학교에 지원해 합격했다. 1926년 전북 군산 옥구면에서 태어난 그는 개정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멀리 이리로 시험을 보러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최 원장의 할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맏이였던 그가 보살펴야 할 어린 동생이 넷이나 있었다.
비록 이리농림학교엔 갈 수 없었지만 그는 이 도시로 건너와 친척의 소개로 영정통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시계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열심히 기술을 익히면서 어머니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해 11월 27일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가져갈 수 있는 물품과 현금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배낭 1개와 양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물건만 허락됐고, 현금은 1000엔까지만 가져갈 수 있었다. 지금 우리 돈으로 따지면 200만 원 정도다.
시계공장 주인은 일본에 가져가 봐야 쓸모도 없는 땅문서와 집문서를 가장 믿을 만한 직원이던 최 원장 아버지에게 맡기고 떠났다.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없지 않았을 터. 하지만 다시는 한국 땅을 밟을 수 없었고, 땅과 공장은 이른바 '적산'으로 분류돼 미군정이 세운 신한공사(New Korea Company)를 거쳐 최 원장 아버지 몫으로 넘겨진다.
미군정은 주택 8만 2000여 채, 100만 엔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 500여 개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경지 32만여 정보 등을 민간에 팔았는데,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먼저 넘겼듯 종업원들에게도 사업체를 먼저 살 수 있게 해줬다. 불하대금도 15년까지 나눠서 낼 수 있게 했다.
최 원장 아버지는 시계공장 자리에 새로 가게를 열고 서울에서 시계를 떼다 팔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중앙동의 전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