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사는 거죠."
- 목숨을요?
"정의를."
남자친구가 우산을 던져 여자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 얘기했을 때였다. 남자는 2심에서 합의금 2억 원을 내고 집행유예형을 받았다. 이를 두고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정의'를 말했다.
"잘못한 놈이 엄벌 받는 것, 억울하게 죽은 사람 피해가 어떻게든 구제되는 것, 국가가 그런 부분에서 책무를 다하는 것, 이게 정의잖아요. 그런데 그 정의를 돈으로 사는 거예요, 말하자면."
정의를 돈으로 살 수 있는 나라이기에, 여자는 사망했지만 남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나 남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결국 피해자는 죽었으니 고려 대상이 아니고 살아있는 피고인만 '잘 살아보세'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불행히도 죽어서 무시되는 쪽이 유달리 성별이 몰렸어요, 거의 여자라는 거죠."
그래서 이 교수는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볼수록 여자들은 '정의가 없다'라고 강렬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와 두 차례(7월 27일, 9월 11일) 이야기를 나눴다.
일러스트 - 이강훈
<오마이뉴스>가 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이용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발생한 '교제살인'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수사 단계에서 살인이 아닌 치사로 기소돼 재판이 이뤄진 경우는 전체 108건 중 23건(21.2%)이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먼저 "헤어진 연인들의 경우 길 가다 우연히 만날 수 없지 않느냐"면서 "100% 스토킹 기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건 예고된 살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 교수는 "피고인은 '죽을 줄 몰랐다, 죽임을 계획하지 않았다, 우발적'이라고 주장한다"면서 "진술은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고,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그러니 대개가 살인이 아닌 치사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인과 치사의 양형 차이는 크다. 폭행치사에 대한 양형위원회 양형 기준은 2년에서 4년이다. 살인의 경우 그 동기에 따라 참작, 보통, 비난 등 세 가지로 나뉘는데, 보통 동기 살인의 양형 기준은 10년에서 16년이다.
"우리 법체계는 피해자가 살아남았어도 '피고인 사건'을 입증하기 위한 요소로 피해자가 증언 할 뿐이예요. 검찰의 범죄 구성 요건 요소 중 한 개, 흉기 하나 정도 수준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아요.
피해자가 죽었다면, 주변 사람들을 다 조사해야 하잖아요. 가해자가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평소에도 폭행 당해 온몸에 멍이 들었는지 피해자 가족, 친지들은 알 거란 말이죠. 그런데 가해자가 자백하거나 현장에서 체포되면 더 이상 조사를 안 합니다. 경찰도 검찰도 마찬가지예요. 수사를 안 해요. 다 같이 직무유기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자백이 감형 사유가 돼서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거예요. '에라 모르겠다, 죽이고 본다' 이런 종류의 사고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거죠."
이 교수는 이렇게 '피해자의 목소리가 음소거' 된 상태에서는 "재판부의 재량에 따른 형량 차이가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판사들이 '양성평등 의식'을 갖고 사안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데, 판사들은 워낙 격무에 시달려 양성평등 교육 등을 받을 여유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판사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70년대, 80년대 세대 규범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 당시의 양성평등 의식을 갖고 지금까지도 재판을 해오는데 2000년대 들어서 급속하게 바뀐 인식의 변화 등을 따라잡을 수가 없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그래서 이 교수는 "판사 수가 많아져야 하고, 그 판사들이 전문성을 가져야 하며, 사건 기록을 꼼꼼히 모두 읽어보고 제대로 형을 집행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죽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 없는 피해자만 드러누워 있어요. 맞아 죽었다?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갔겠어요. 이런 생각을 해야 해요. 수사관도, 검사도, 판사도, 피해자를 인격체로 봐야죠. 판결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없어지고 가해자의 반성만 남으면 안 되잖아요."
"여성이 죽은 사건이라 법안 처리 밀려... 그렇게 안 볼 수 있나?"
그는 물었다.
"헤어진 사람에 대한 '전조' 없는 죽임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그는 "안 죽었을 수도 있었던 목숨"들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만약에 스토킹 처벌법이 있었으면 어떤 여자들은 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법이 없는 현 상태는) 무방비 상태로 여자들이 알아서 안전을 도모하라고 방치해 놓는 거다, 그래서 재수 없으면 죽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1999년 처음 발의된 스토킹 처벌법은, 21년간 발의만 됐을 뿐 단 한 건도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데이트폭력 관련 법이 5건 발의됐지만,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20번 가까이 관련 법안이 올라갔는데 통과 안 시켜주는 나라가, 여성의 죽음을 막는 데 무슨 의지가 있겠어요. 여성이 죽는 사건이기 때문에 법안 처리가 밀리는 거다, 그렇게 안 볼 수 있나요? 여성의 안전권에 대한 민감도가 너무나 떨어져요. 죽은 여성들이 '재수가 없었다'라고 생각하지, 대체 누가 권리 침해라고 생각하나요. 데이트폭력 사망 여성들에게도 '왜 아무 남자나 만나냐' 손가락질 하잖아요. 지긋지긋한 2차 가해 행위들이 만연해있죠. 이러니 입법이 안 되는 겁니다."
이 교수는 "수많은 (입법 좌절 등의) 실패 끝에 깨달은 바는 한국 사회 인식 변화부터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라며 "인식 변화를 위해서는 나 같은 사람이나 언론이 욕먹을 각오를 하고 '여자들도 살 권리가 있고, 즐길 권리가 있고, 선택할 권리가 있고, 거절할 권리가 있다'라고 계속 떠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인식 개선'이라는 큰 벽을 부숴가는 동시에 입법을 위한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 일단 21대 국회는 '스토킹 처벌법' 처리에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이수정 교수가 참여한 국민의힘 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는 지난 9월 '스토킹 범죄 처벌법'을 발의했고, 그에 앞서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지난 6월 비슷한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부산 덕천 지하상가에서 발생한 데이트폭력 영상이 퍼지면서, 스토킹 뿐 아니라 데이트폭력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데이트폭력을 엄벌하는 법은 21대 국회에서는 아직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예비적 행위를 제재할 법 체제를 만든다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해요. 사소한 스토킹, 연인 간 폭력을 신고해서 (가해자를) 상습범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몇 회 이상 신고하면 징역형 가게끔 해야죠. 그러면 여자들은 열심히 신고할 겁니다. '살려달라'고."
이 교수는 '법원조직법'이 개정돼야 "여자들이 죽어나가는 걸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아직 중상해를 입지 않은 여성 관련 사건은 대부분 가정법원으로 넘어가요. 거기는 임시 조처나 보호 조치를 주로 담당하죠. 데이트폭력도 입법이 되면 가정폭력처럼 가정법원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은데, 가정법원에는 형사부가 없어서 형사 처벌을 못 하죠. 가정법원에서 재판을 못하고 도로 형사법원으로 이송을 해야 합니다. 그 절차가 3~6개월이 걸려요. 그 사이에 여자가 죽는 겁니다.
이걸 막으려면 가정법원이 작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접근 금지, 임시 조치 등을 취하고 임시 조치를 3회 이상 위반하면 가정법원에서 구속 조치도 취할 수 있게 가정법원 내 형사부를 추가해야 합니다. 법원조직법 개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요. 이렇게 되면 '데이트폭력' 등을 다루는 여성 폭력 전담 법원이 생기는 셈이죠. 지금은 형사법원으로 사건을 보내는 것과 관련해서만 입법에 열을 올리죠. 그러니 구멍이 뚫리고, 여자가 죽어야 끝나게 되는 겁니다. 죽기 전에 막아야죠."
제대로 된 처벌이 적시에 이뤄지도록 시스템이 갖춰져야, 스토킹 혹은 데이트폭력 끝의 비극적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야 '돈으로 살 수 없는 정의'가 바로 설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