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살인 예고였다.
"너 가면 죽겠다"고 했다. 남자가 부엌칼을 자신의 배에 갖다대면서 한 말이었다. 여자는 헤어지자고 했다. 남자는 "마지막"이라고 했다. 보름여가 지났다. 남자의 손에 들린 부엌칼이 이번엔 여자에게 향했다. "너 이제 끝났다"고 남자는 말했다. 다시 이 십여 일이 지났다. 남자는 또 부엌칼을 들고 말했다.
"우리는 끝이다. 너는 살아서 못 나간다."
그 다음, 여자는 탈출을 시도했다. 2017년 6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여자가 집밖으로 내달렸다. 남자가 뒤따랐다. 주차장에서 여자가 넘어졌다. 남자는 여자를 강제로 자신의 차에 태웠다. 40분 동안 달리고 또 내달렸다. 여자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여자를 협박하고 차에 감금한 남자는 구속됐고 재판을 받게 됐다. 여자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2017년 8월, 남자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두 달이 또 흘렀다. 남자는 여자의 손과 발을 넥타이로 묶었다. 입에는 양말을 물리고 미니 냉장고 정도 크기 철제 금고에 여자를 묶었다. 잡아 흔들었다. 때렸다. 걷어찼다. "병원에 가겠다"는 피해자를 4시간 동안 가뒀다. 다시 남자에게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
영장실질심사 전날, 남자는 여자에게 향했다. 그들은 말다툼을 했고, 남자는 여자의 목을 졸랐다. 남자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석 달여 만에 여자는 그렇게 살해됐다. 1심 재판부는 남자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변호사도 항소하고 검사도 항소했다.
(1) "더욱이 이러한 일련의 범행들이 모두 같은 피해자에 대한 범행으로 인하여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받고 그 집행유예 기간 중에 범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략) 피고인과 피해자가 연인 관계였다는 사정은 그것이 피고인의 죄책을 더욱 무겁게 평가할 수 있는 사정이 될 수 있을지언정, 피고인을 위해 유리하게 평가될 수 있는 사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심 재판부는 남자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오마이뉴스>가 2016년~2018년 사이 발생한 '교제살인' 판결문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가 동일 가해자에게 살해된 피해 여성은 모두 6명이었다. 판결문에 적시된 피해자의 처벌불원 관련 내용을 각각 요약했다.
(2) "피고인은 2016년 2월 12일에도 피해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수 회 때려 상해를 가한 바 있었고, 당시 피해자가 용서해주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개월 후, 피해자는 벽에 피를 뿜었다. 발로 얼굴을 차여 피투성이가 됐을 피해자가 피신할 곳이, 거기엔 없었다. 쫓아 들어온 가해자는 피해자를 짓밟고 또 짓밟았다. 사망 당시 피해자의 몸무게는 36kg이었다. 피해자는 화장실에서 숨졌다.
(3) "피해자는 상해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 과정에서 동거남이자 결혼을 앞둔 사이였던 피고인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였는데, 피고인은 피해자의 용서가 무색하게도..." 6개월 후, 가해자는 수 십 차례에 걸쳐 피해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얼굴, 머리... 무차별적인 폭행이었다. 잔혹했다. 피해자는 역시 도망갈 곳이 없었다.
(4) "피해자는 변호인을 통해 처벌불원서를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판 기일에도 직접 출석하여 피고인과 다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용서와 관용 덕분에 이를 유리한 양형 요소로 참작 받아..." 풀려난 지 3개월이 흐른 후였다. 앞서 피해자 승용차에 불을 질렀다가 집행유예를 받았던 가해자는 이번엔 칼을 들이댔다. 가해자의 승용차 안이었다.
(5) "식칼을 휴대하여 피해자를 협박하는 범행을 저질렀다가 피해자의 합의 및 탄원으로 집행유예의 선처를 받았음에도 자숙하지 않고..." 10개월 후, 가해자는 다시 부엌칼을 들었다. 법정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먼저 칼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녹음된 파일이 있었다. 이를 청취한 재판부는 "피해자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물건을 찾는 소리가 들린 뒤, 피고인이 피해자가 있는 곳을 향해 큰소리 치며 다가왔다"며 가해자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해자가 있던 곳은 안방이었다.
피해자 6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전한 시점에, 그들은 모두 가해자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가해자와 같은 집에서 일상을 보내며,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에서 사법 절차를 진행하더라도 피해자는 피해 보상 및 안전은커녕 가해자의 보복부터 걱정해야 한다. 형사소송을 통해 가해자에게 벌금이 부과되어도 가해자와 경제공동체인 피해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처벌을 망설이기도 하며..." (2020 한국여성의전화 정책 제안 중)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정책팀장은 "처벌불원을 법 조항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팀장은 "경제적 공유 상황에서는 가해자가 벌금형을 맞게 되면 피해자가 부담하게 되는 이상한 일도 발생한다"면서 "가해자 쪽에서 집요하게 처벌불원을 요구하거나 협박까지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응하는 사례도 많다, 피해자 의사 존중이라면서 처벌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는 피해자의 죽음이었다.
(6) "그때마다 피해자는 피고인을 용서해주었고, 피고인은 피해자에 대한 폭력 범죄로 체포되었다가 피해자의 처벌불원 탄원 등을 이유로 구속을 면하기도 하였는데, 피고인은 그 후 채 2개월이 지나지 않아..." 가위로 자신의 등을 찌른 가해자를 용서해줬던 피해자는 가해자가 휘두른 부엌칼에 찔렸다. 그들이 함께 지낸 4개월여 동안 가해자는 피해자를 때려 9차례나 형사입건이 됐다.
이 사건은 2018년 5월 세상에도 널리 알려졌다. '구속 면하도록 선처해 준 동거녀 살해'와 같은 제목의 기사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표시했다. 어떤 이는 "동거녀가 처벌을 원하지 않은 건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란 걸 삼척동자도 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약자를 마음대로 살해당하게 둘 거면 법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법원이 죽였다"는 말이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하지만, 이런 댓글도 적지 않았다.
"매도 중독이다."
"죽을 짓을 했다."
"어리석은 여자가 문제지."
피해자가 처벌불원한 것을 두고 또 한편의 사람들은 조롱하고, 넘겨짚고, 매도했다. 죽고 나서야 쏟아진 관심 속에서 피해자는 또 한 번 죽임을 당해야 했다.
위 댓글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손가락질을 잊어버렸을 것이고, 지금도 누군가의 살인예고는 피해자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