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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헛방아 찧는 게 꼭 누구 같데이!"

물레방아 도는 내력?

등록|2008.10.23 20:48 수정|2008.10.23 20:48

물레방아지난 21일 문경새재를 걷다 왕건과 대왕세종 세트장이 위치한 곳 가까이에 이르자 생뚱맞게 물레방아 하나가 돌아가고 있더군요. ⓒ 김학현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냇가에 다리를 놓고 고향을 잃은 길손 건너게 하며 봄이면 버들피리 꺾어 불면서 물레방아 도는 내력 알아보련다." (물레방아 도는 내력/손로원 작사)

어린 시절 몇 번 들었던 기억이 있는 노래입니다. 지난 21일 문경새재를 걷다 왕건과 대왕세종 세트장이 위치한 곳 가까이에 이르자 생뚱맞게 물레방아 하나가 돌아가고 있더군요. 그 운치가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헛방아 찧는 물레방아

순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옛 노래가 머리에 스치는 겁니다. 흥얼대 봤죠. 물론 앞 소절만 하는 척했습니다. 집에 와 인터넷을 뒤지니 가사가 참 정겹군요. ‘고향의 물레방아’, 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입니다.

저보다 조금은 더 연세 드신 분들이 젖을만한 감흥에 제가 젖었습니다. 물끄러미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경상도에서 오신 아주머니 군단이 왁자지껄 떠들며 물레방아 돌아가는 데로 들어섭니다. 그러더니 서로 웃으며 이런 대화를 합니다.

▲ 물레방아가 뱉어놓은 물에는 낙엽이 질펀하게 가을 이야기를 쓰며 떠있습니다. ⓒ 김학현


“저 것 보라마. 물레방아가 지 혼자 돌아가고 자빠졌데이!”
“아이고, 이 예편네 저건 가짜 아니가.”
“가짤 뭐 하러 돌린데?”
“거야 보기 좋으라고 헌 거지. 경치 쥑여주는구마.”
“거 헛방아 찧는 게 꼭 누구 같데이.”
“누꼬?”
“우리 집 지랄 같은 영감탱이지. 누군 누꼬?”
“하하하하.”
“깔깔깔깔.”

옛날정취, 시골정취를 온몸에 지니고 도는 물레방아가 이리 여러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군요. 그러나 지금 돌고 있는 물레방아는 예전의 그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예전의 물레방아는 그게 곧 삶이요 생존이었습니다. 낱알들을 빻는 도구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물레방아는 다 가짜입니다. 물을 억지로 퍼 올려 그 물로 돌리죠. 목적은 그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거죠. 그야말로 그냥 운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거지요. 그러니 아줌마들 말마따나 헛방아 찧는 겁니다.

삶이 진하게 밴 게 물레방아

문경새재의 사연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인 물레방아입니다. 근데 그런 물레방아가 문경새재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상도 선비들이 괴나리봇짐 꿰차고 출세의 환상을 안고 서울로 과거를 보러 넘나들던 길이 아닙니까.

▲ 물레방앗간 앞마당에도 낙엽들만이 구릅니다. 낙엽을 깔고 앉은 아내가 꼭 ‘가을여자’입니다. ⓒ 김학현


‘물레방아 도는 내력’은 시골살이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물레방아는 시골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고요. 문경새재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이죠. 선비들이 시골을 떠나기 위해 걸었던 길이니까요. 그런데도 문경새재를 걷는 사람들 누구 하나 그런 생각을 할까요. 운치 있게 돌아가는 물레방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뿐이죠.

격세지감이라고 하고 넘기기에는 아린 구석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생존이 누구에게는 놀잇감이라니. 요즘도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게 우리 주변에서 벌어집니다. 누구에게는 전 재산이 누구에게는 유흥비죠. 누구에게는 생존권의 문제인데, 누구에게는 품위유지의 문제죠. 누구에게는 가족의 생사여탈권이 달려있는데, 누구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죠.

330만 농민은 쌀 직불금 문제로 뿔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방아 찧는 물레방아는 계속 돌아갑니다. 정치권에서, 공무원 사회에서, 청와대에서…. 생존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물레방아가 이제는 운치나 폼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네가 아는 만큼 나는 모른다.
네가 도는 만큼 나는 못 돈다.

그렇게 부질없이는 살지 말라 배웠기에
그다지 무의미하게 돌아버릴 수는 없기에

네가 돌고 난 자리엔 낙엽만 무성하구나.
내가 돌아 간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물레방아야 너는 알고 도니?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물레방아 도는 내력이 바뀌었듯 문경새재 걷는 이유도 다릅니다. 그때는 출세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절제절명의 길이었는데, 이제는 유흥과 건강을 위한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물레방아가 뱉어놓은 물에는 낙엽이 질펀하게 가을 이야기를 쓰며 떠있습니다. 물레방앗간 앞마당에도 낙엽들만이 구릅니다.

낙엽을 깔고 앉은 아내가 꼭 ‘가을여자’입니다.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가을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낙엽이 구르듯 그렇게 제 아내도 저도 가을의 자락을 깔고 살다 불현듯 사라져 가겠지요.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갓피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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