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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대학생... 23년 만의 장례식

[인터뷰] 1988년 실종된 안치웅 열사 장례 준비하는 박종부씨

등록|2011.05.28 10:02 수정|2011.05.28 10:02
안치웅은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재학 중인 1985년 구로에서 동맹파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연대한 농성단을 이끌고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는 막강한 경찰진압대의 몽둥이에 실컷 두들겨 맞고 곧 감옥에 구속되어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는다.

▲ 안치웅 열사 ⓒ 박종부

1986년 7월 4일 전두환 군사정권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 1년여 징역을 살고 안치웅은 출소한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안치웅은 끊임없이 수사기관으로부터 감시와 사찰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1988년 5월 26일 강동구 암사동 한 교회에서 교사로 활동 중 그는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하여 오전 9시경 집을 나간다. 그러나 그 이후 현재까지 그는 행방불명이다. 실종되었다(관련 기사 : "나와의 약속장소에 안나왔다"). 지금 안치웅이 어느 곳에 있는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23년 전 어느 날, 대학생 안치웅이 홀연히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이다(관련 기사 : 노진수,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안치웅의 부모님은 전국을 헤매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 피울음을 삼키며 살아왔다. 그리고 22년 1개월여가 지난, 2010년 7월에야 겨우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에서 안치웅의 실종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것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실종사건에 국가공권력이 개입됐음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그의 실종 23주년에 맞춰 5월 29일, 이제야 겨우 서울대광장과 마석민주열사묘역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른다. 23년 만에야 비로소 치르는 장례식인 것이다.

23년 만에 시신없이 치르는 대학생 안치웅의 '초혼장'

▲ 안치웅 열사 ⓒ 박종부


안치웅이 그렇게 염원하고 그리워하던 세상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몇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그의 넋이라도 달래 주고자 한다. 그가 그토록 꿈꾸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행방불명자가 아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던진 열사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청년회장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씨를 만났다. 박종부씨는 지금 안치웅 열사의 장례식을 열심히 준비 중이다. 다음은 지난 25일 박종부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지난 2010년 늦었지만 '안치웅 실종사건'에 국가공권력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국가로부터 처음 인정받았는데, 그 후 이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정부의 조사나 어떤 진전이 있었나?
"2010년 7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안치웅을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행방불명자로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포괄적인 의미로 본다면 국가공권력의 개입에 의한 행방불명임을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안치웅을 행방불명에 이르게 한 국가공권력의 구체적 실체, 불법성을 밝힌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포괄적으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또 안치웅의 활동상을 반영하고, 안치웅이 수사기관의 감시대상이었다는 것을 놓고 개연성을 따져 인정한 것이다. 도대체 안치웅을 행방불명에 이르게 한 부당한 국가공권력은 무엇인가? 안기부인가? 경찰인가? 정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조사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여전히 그 당시의 폭압기구(현 국정원, 기무사 등)가 존재한다. 더 밝혀진 것도 없고 과제만 산적하다."

- '안치웅 실종사건'의 명예회복과 관련된 일과 23년 만에 진행되는 초혼장에 관여하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었나?
"안치웅을 이대로 행방불명 상태로 놓아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시신도 찾지 못했고 개입한 국가공권력의 실체를 규명하지는 못했지만 언제까지 행방불명인 상태로 놓아 둘 수 있겠는가? 만족스럽지 않지만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하여 안치웅의 삶과 죽음이 최소한으로 명예회복이 된 만큼 이제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또 구천을 떠도는 안치웅의 억울한 영혼을 말 그대로 초혼장을 통해 현실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의 청년회장을 맡아 활동하다 보니 그동안 수없이 보아온 유가협 어른들의 고단한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작은 마음이라고 하겠다."

- 과거 안치웅씨의 변론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가 2010년 2월 '안치웅 실종사건'과 관련하여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안치웅은 출소 후 지속적으로 감시 사찰을 받은 것으로 판단됨… 당시 안치웅이 감시상황에 놓였다고 추단케 하는 정황적 배경들이 확인됨… 공안당국의 감시사찰 상황 말고는, 달리 안치웅의 실종을 설명할 합리적 이유가 없음"이라고 되어있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 공식적 사과나 유족에 대한 배·보상 조치가 있었나?
"안치웅의 경우뿐만 아니라 거의 대다수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사과가 없는 보상이다 보니 그 보상이라는 것도 사람의 목숨을 국가권력이 빼앗은 중대범죄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 2000년 9월 안치웅의 부모님이 고 김대중 대통령에 보낸 탄원서를 보면 "자기(안치웅) 뒤를 기관원이 미행을 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희는 암사동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간혹 기관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찾아와 아들에 관해 '요즘 무엇을 하느냐, 어디에 다니느냐?'등 그의 행적에 관해 묻고 가곤 했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정황자료들을 보면 안치웅이 행방불명이나 의문사가 아니라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군부독재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수없이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서슬 퍼런 시절에 시신이 있으면 의문사고 그나마 시신이 없으면 행방불명이라고 했으니 무엇이 의문사고 무엇이 행방불명인가? 안치웅은 타살이다."

- 안치웅씨 부모님이 실종된 아들에 대한 탄원서를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후 정부에서 어떤 조치가 있었나?
"2000년도 9월 26일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는데 비서실 관계자가 그 다음날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제출했다고 한다. 이튿날인 27일 서울경찰청에 이첩했다는 문서가 집으로 왔으며 경찰청에서 안치웅 부모를 불러서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경찰청으로 탄원서를 보냈다고 하면서 안치웅을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찾아도 없다고만 했다고 전해 들었다. 담당 경찰이 어떻게 찾았으면 좋겠냐고 묻길래 각 복지원 같은 곳을 다 찾아보라고까지 말을 했다고 한다.

서울경찰청에서는 안치웅이 김해교도소 수감 중 옥중에서 실제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했다는 사실 정도만을 알아냈을 뿐이라고 한다(안치웅 어머니의 말씀에 기반한 사실이다). 또 서울경찰청은 2000년 당시 청와대 지시에 따라 폭력계 형사들로 전담반을 구성, 1988년 실종된 안치웅의 행방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힌 적도 있다."

- 23년 만에 열리는 이번 5월 29일 안치웅씨 장례식의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고 주로 몇 분이나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나?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초혼장으로 치러진다. 안치웅과 같이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오늘까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유가협과 이번 초혼장을 공동주최할 것이다. 또한 안치웅 동지의 서울대 동문들과 고등학교 동문들, 과거 학생운동 당시 함께 했던 동아리 선후배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함께 했던 모임(안치웅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노-학연대 차원에서 동조 농성에 들어갔다가 연행되어 구속된 바 있다)이 '안치웅을기억하는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주최를 할 것이다. 안치웅의 후배들인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와 재학생들이 역시 공동으로 주최할 것이다.

아울러 죽어간 이들의 삶과 정신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단체인 추모연대도 그 장례의 한 축을 담당한다. 여러 단체가 모인 것 같지만 딱 모일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다. 몇 명이 모일지는 각자가 안치웅을 생각하고 또 23년 이렇게 방치되어온 것에 대한 미안함과 무엇이라도 만들어 가보자는 의지만큼 모이지 않겠는가? 이 기사를 보고 안치웅을 아는 사람들, 마음이 와 닿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29일 오전 9시30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입관식을 진행하고 오전 10시에 영결식을 엄수할 예정이며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위치한 용산5열사 옆에서 오후 1시에 하관을 할 예정이다."

"국가 권력이 국민 압살하고 죽음 은폐한 일 철저히 규명돼야"

▲ 안치웅 열사의 장례식을 준비 중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청년회장 박종부씨 ⓒ 박종부


- 과거 권위주의 정권기간 동안 안치웅씨 같은 실종사건을 전부 몇 건으로 파악하나?
"세상에 드러난 사건 중 여전히 행방불명인 사건으로는 심오석(1976년, 경북대생), 노진수(1982년, 서울대생), 안치웅(1988년, 서울대) 등 3건으로 알고 있고, 시신을 찾은 경우는 사건발생 9개월 만에 찾은 정경식(1987년, 대우중공업노동자)부터 9년 만에 찾은 박태순(1992년, 노동자)의 경우까지 부지기수다. 박태순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시신을 찾으면 의문사가 되고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는 행방불명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 과거 장준하 의문사를 조사한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한 조사관은 "조사해보면 모든 정황상 심증은 확실히 가지만 조사권한이 미약해 결정적 증인이 발을 빼버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치웅씨 같은 실종사건도 정부에서 의지를 가지고 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면 진실규명이 가능하다고 보나?
"나 또한
유가족으로서 고민이 많이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가능하겠는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권력을 개인 또는 한 당파가 장악하여 그 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압살하고 그 시신을 유기하고 죽음을 세상과 역사에 은폐한 이 경악할 일들은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가능성을 물어본다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답하고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상규명 기구를 만들어봐야 '권한이 없어서'라고 면피하고, 그 결과라는 것도 여전히 존재하는 국가폭압기구들(국정원, 기무사 등)에 의해서 자신들 내부에서 공개해야 할 자료와 비공개자료, 폐기자료로 구분된 자료 중 공개자료에만 의지하다보니 엄밀히 말해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진상규명일 수가 없다.

허원근 사건을 예로 들면, 당시 특조단장을 하며 의문사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뒤집었던 당사자가 모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허원근 조사를 여러 경로를 통해 압박했음이 드러났고(관련기사: 정수성 의원! 자료 요구할 자격 없습니다), 동생(박종철)사건만 해도 당시 검찰이 사건을 규명한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당시 청와대, 내무부, 치안본부 등이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걸 통해 이를 적정선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다는 것도 드러났지만 당시의 검찰 측 관련자는 현재 여전히 여당의 실세로 있다.

정부의 의지정도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원 주인을 찾아가게 하고 폭압기구들을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 병행될 때 진상규명위원회가 다시 만들어져도 제대로 된 의지를 가질 수 있지 않겠나."

▲ 안치웅 열사 ⓒ 박종부

- 향후 안치웅씨 실종사건은 역사의 미궁으로 남겨 둘 것인가? 아니면 진실규명을 위해 기타 추가 노력 등을 할 계획이 있나?
"안치웅을 비롯한 실종자들과 의문사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안치웅의 경우에는 이름과 활동상만 있지 오늘이 없었다. 현실이 없었다. 이번 초혼장이 안치웅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안치웅을 현실에 복원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3년은 너무 길었다. 그 유가족들에게만 그 고통을 지워온 지난날을 이제는 결속해야 한다."

- 안치웅씨 같은 '실종사건' 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정부의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나?
"사찰하고 감시하고 잡아 가두었던 폭압기구들을 해체해야 하는 수밖에 더 있나?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국정원, 기무사, 공안경찰 등 가해기관들을 해체해야 한다. 아울러 헌법에 명기된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오랜 기간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을 가능케 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너무 원칙적인 이야기겠지만 비슷한 일이 재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정부'나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이런 것들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지난 과거사위원회들의 활동이 결과적으로 반쪽에도 못 미치는 결과(혹자들은 가해자들에게 합법적인 면죄부를 줬다고 하는)를 양산하여 오히려 과거사 청산의 본질을 흩뜨려 놓은 측면도 강하다. 차제에는 실제 권한을 갖는 진상규명기구를 독립기구로 상시적으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3년이 너무 길었다. 안치웅의 부모님과 유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하고 미안하다. 이번 초혼장을 계기로 안치웅과 같이 고통 받다 사라진 이들, 지금도 현실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느끼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 박종부씨는 현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유가협 청년회는 유가협 어른들(자녀, 배우자를 잃은 분들)의 2세들 즉, 죽어간 자들의 형제, 자매 혹은 자녀들로 이루어진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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